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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기자 Feb 12. 2021

어느 아이나 구린 구석 하나는 있다

있는 그대로에 내 아이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평생을 교육업계에 있으셨던 한 어르신이 해주신 말씀이다.


"어느 아이나 구린 구석 하나는 있어"


어떤 말보다 가슴에 꽂혔다. 이 말에 위로받았다면 이해할까. '내 아이가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야 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뭘 잘못했나' 아이를 키우며 물음표가 백만 개쯤 달린 것처럼 답을 모를 때 누군가에게 툭 들은 말 한마디다. ('구리다'라는 단어를 쓴 것은 좀 더 상대를 잘 이해시키기 위한 표현일 뿐 나쁜 의미는 없다.)


이 말을 마음속에 담고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다시 한번 곱씹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마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같은 반 친구들을 물고 어린이집 선생님 말에 위축되어 있을 때라 더 와 닿았을지 모른다. 그 이후에도 간혹 아이 키우는 게 힘들고, 막막할 때면 이 말을 떠올린다.






"00이는 붙임성도 좋잖아요. 인사도 잘하고, 사람에게도 잘 다가가고..."

"아휴, 붙임성이 워낙 좋아서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탄 분에게 '아줌마는 왜 그렇게 뚱뚱하세요?'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바로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가르쳐서 그렇습니다' 거듭 사과드리고 문 열리자마자 황급히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이를 키우며 뭐 하나 쉬운 것이 없던 나는 가끔 우리 아이와 다른 기질을 가진 순하거나, 성격이 둥글둥글하거나 붙임성이 좋은 다른 집 아이들을 몰래 부러워하고는 했다. 아이마다 다 다른 것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때때로 너무 힘들고 지치는 날이면 심정적으로 그럴 때가 있었다.


"우리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어해요. 깨어나는 것 자체가 아이한테 불편한 것 같아요. 일어나서 30분 정도 다독여줘야 해요"

"우리 아이는 '00아, 일어나'하면 '네'하고 일어나요"

"그런 친구도 있구나... 잘 때도 그래요?"

"네, 우리 아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무엇이든 말로 설명하면 따라와 줘요"

"그게 가능해요? 떼를 쓰거나 싫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 적이 없어요. 그런데 또 너무 자기감정을 표현하지는 않나 걱정돼요. 코로나로 몇 주 집 밖을 안 나갔을 때, 아이에 기초체온이 올라갔나 했어요. 체온을 매일 재는데 매번 정상 체온보다 높은 거예요. 그런데, 하루 밖에서 실컷 놀고 집에 와서 저녁에 체온을 재봤는데 정상 체온이지 않겠어요? 못 나간 게 큰 스트레스였나 봐요. 아마 마음에 '화'로 있으니깐 체온도 높았던 것 같아요. 근데 그걸 표현을 안 하니..."


이게 가능한가. 엄마에 말을 그대로 따라가는 아이에 얘기를 들으면 '저 엄마는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지... 나라라도 구했나'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넋 놓고 듣다가 그것조차 어떤 상황에서는 엄마에 걱정거리가 되는구나 할 때가 있다.


막상 얘기를 하다 보면 다들 그 나름에 고충이 있다. 순해서, 수동적이어서, 자기감정을 표현하지 않아서, 붙임성이 좋아서, 경계가 너무 없어서, 상황에 따라 걱정거리가 되기도 했다.     


인생 저마다 살 듯 아이도 저마다 빛깔을 드러내는 것인데 나 편하자고 아이를 내 틀에 생각했구나 하며 다시 한번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고 애쓴다.






있는 그대로 보는 삶은 오랜 기간 명상을 하면서 수련해온 내용이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며 내 마음을 지켜보면서 '내가 도대체 명상이란 걸 한 건 맞나' 할 정도로 여러 가지를 마주해야 했다.


아이를 키울수록 아이가 이쁘면 이쁠수록 공허감은 커져갔다. 아이가 이쁘다고 내 자아를 실현시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낳았지만 문득문득 내가 사라지는 느낌에 무기력하거나 우울하기도 했다.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지쳐갈 때면, 내가 낳은 아이인데도 미울 때가 있다. 절대적으로 사랑하지만 또 한편으로 미움 마음이 든다. 이런 이중적 감정에 스스로 또 다른 죄책감을 만들고, 혼자 굴을 파다가 정신을 차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두고 다른 자식과 비교할 수 있냐고 의문을 가졌지만 막상 아이를 키우며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스스로에게 실망을 하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며 그 어느 때보다 수련을 많이 한 것 같다. 언제가는 끝이 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아이 중심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연애하듯 안 되겠으니 헤어질 수도 없고, 직장처럼 그만두거나 이직할 수도 없다. 도망갈 곳이 없다. 오롯이 책임을 져야 하고 내 몫이다.  


그래서 안간힘을 쓰며 그 순간을 더 깊이 마주하고 인정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던 것 같다. 정말 명상하며 추구했던 '순간에 집중하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을 실현'하면서.


내 아이에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내 아이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한 걸음 내디딘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나다. 아이는 그대로였고, 지금도 그대로이고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 아이를 바라보고 대하는 나만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면 될 터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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