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기자 Oct 15. 2021

걷다 보면 잃어버렸다

이 세상에 온 적이 없어 가는 것도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전화가 왔다. 꿈자리가 사납다고 했다. "천도가 잘 안됐을까." 그는 아픔을 움켜쥔 채 "아니야, 나는 괜찮아"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내 말이 닿을까. 안다는 말을 재잘거리면서도 사실 알지 못했다. "당연한 거야", "시간이 필요한 거야"  따위의 말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주변의 상실들은 흔한 게 되어버렸다. 조금 걷다 보면 잃어버렸다. 궁금했다. 죽으면 어디를 갈까. 어느 스승은 그랬다. 오고 감이 없다고. 이 세상에 온 적이 없어 가는 것도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가 아팠던 건, 사랑하던 누이를 잃었기 때문이다. 나와 나이가 같은. 남 달랐던 그들의 애정을 이제 볼 수가 없어 슬펐다. 어떤 이에게 오누이를 잃은 슬픔은 좀 달랐다. 죄책감, 그래, 그 죄책감이 더 커 보였다.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이 오랜 상처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남편도 그랬다. 자신을 사랑으로 품어 준 할머니의 죽음은 자연스러웠지만, 아픈 누나의 상실은 그러지 못했다.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은 마음의 덩어리로 남아 보였다. 시간이 흐르며 옅어지지만 마음의 흉터는 매만지면 떠오르는 무언가였다.



 어떤 떠남은 인사를 할 수 있었고, 어떤 떠남은 갑작스러웠다. 그 전 날 연락을 하고, 다음 날 비보를 받은 내 아버지의 죽음이 그랬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웃집 경비 아저씨의 죽음이 그랬다. 밤새, 안녕이었다. 인사를 건네었다면 괜찮았을까. 그래 봤자, 죽음은 죽음인 걸까. 까맣게 잊어버렸다가도 그 사람들의 빈 공간을 느끼며 생각이 난다. 감정도 함께 일어나고 그저 서서 그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죽음은 죽음이다.


 한 아이가 계단 끝자락에 앉아 울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상실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배가 불렀다. 나에게 "이겨 낼 거라" 말했었다.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아이가 울고 있을 때, 갔구나 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의 울음을 몇 번 보았고, 남은 아내들을 지켜보았다. 몇 명은 넘쳐흐르는 마음을 벗어나려 이 나라를 떠났다. 문득 생각이 난다. '잘 지내고 있을까.' 직장 동료의 장례식장에서도 그랬다. 어린 두 아이를 둔 엄마의 죽음이었다. 남편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우리 또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말이 더 이상 말이 되지 못했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부유물 같았다.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돌고 돌다가 계속 도는... 죽은 이에게는 이 말이 닿을까.


 그러나 제일 슬픈 건, 떠남 앞에서 겸손해지는 나 때문이다. 투덜거리며 살다가도 잊고 있던 누군가의 상실을 마주하고 나면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을 늘 불평하며 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어설픈 생각도 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앞에서 오늘 하루도 억척같이 살아내는 나를 보며 웃음을 짓기도 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다시 내게 돌아올 때는 이런 것들로 오는 것이 못내 또 부끄럽다. 그런 날은 부끄러움을 털어내려 걷고 또 걷는다. 걸을 수밖에.


 그나저나... 오고 감이 없다면 그냥 있는 건가.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와 역류성 식도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