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저녁이 저물 때 / 예니 에르펜베크
작가의 내밀한 의도를 파악하는 독서는 쉽지 않다.
"매니아"라고 불리는 독자들은 그것에 일치를 맛본 사람들일거다. 배수아 작가가 번역한 예니 에르펜베크의 소설. 연극을 전공하고 오페라를 연출한 이력에 걸맞게 소설의 형식도 독특하다.
장과 장 사이에 <막간극>을 끼워넣어 죽은 자를 부활시킨다. 소망이 있는 부활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신의 선물이 아니다. "만약에 ...다면"처럼 후회를 빌려와 다시 살린 <그녀>를 전쟁과 이데올로기 피바다에 던져 놓는다.
<죽지 않은 그녀>는 죽은 친구의 애인을 짝사랑하다 자살하고 작가는 그녀를 <다시 죽지 않았을 그녀>로 부활시키고, 파시스트가 되어 핵심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하나의 사상인가, 아니면 단 한 명의 인간인가?//
그러나 그녀는 체제 안에서 배신당하고 팔아넘겨져 처형된다. 하지만 작가는 또 다른 막간극으로 <또 다시 죽지 않고 살아가는 그녀>를 만들어 새로운 시대를 이어간다. 계단에서 추락한 공산주의 작가를 살려내 요양원의 치매노인으로 천수를 누리도록 소설을 완성한다.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친 전선인 걸까?//
우리 모두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한 걸음 씩 멀어져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단지 과거를 팔아서 미래를 살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죽든지 죽음은 죽음이다.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는다는 차이뿐. 작가는 한 가족의 역사를 통해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죽음과 삶을 성찰하게 한다. 독특한 소설의 구성이 무거운 분위기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독서의 몰입을 끌어낸다.
이 소설에는 사람의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마지막 장이 되어서야 <호프만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였고 그녀의 딸도 그녀이다. 파시스트 동지들의 이름은 모두 알파벳 이니셜로 부른다. 익명성은 이 소설의 전면에서 마치 도전적인 자세로 독자에게 질문하는 듯하다.
//인간이 무엇으로 인간을 알아보는지, 난 잘 모르겠다.//
작가의 독특한 문체 또한 여느 소설과 다른 매력을 지녔다. 쉼표와 쉼표 사이. 어떤 문장에서 나는 10개의 쉼표를 찾았다. 첫 장에서 익숙하지 않은 문체에 당황했지만 곧 무거운 주제의 소설을 탄력있게 이끄는 것이 독특한 매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쉼표와 쉼표 사이의 의미에 집중하다가 문장이 아니라 시간으로 빠져들게 된다.
에르펜베크가 10년전에 출간한 <그 곳에 집이 있었을까>라는 절판된 소설까지 찾아 읽어보았다. 호숫가 집을 배경으로 역사의 이면을 깊게 추적하는 능력이 탁월한 소설이었다.
좋은 소설은 독자에게 삶을 성찰하게 만든다.
좋은 작가의 책은 독서의 여운이 진하고 길어서 작가의 다른 책을 찾게 만든다.
가끔 함정이 있다. 술술 읽혀지지 않는다는 그 함정을 헛딛으면 이내 책을 덮어버리는 인색한 독자를 만날 수도 있다. <그 곳에 집이 있었을까>를 서점에서 검색했을 때, 절판되어 중고책을 구입했는데, 거의 읽지 않은 새 책을 받았다. 아마도 따옴표가 하나도 없는 페이지들을 보고 '이건 아니잖아! 소설인데...'하면서 책꽂이에서 오랜시간 동면 중이었던 것은 아닐까?
함정에 빠지지 않고 좋은 소설을 쓴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것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죽지 않고 살아가기>를 이어가는 것 만큼 독자의 손에 들려져 읽혀지는 책의 생명도 쉽지 않다. 전쟁도 없는 평화의 시대에 책을 읽기란 왜 그리 쉽지 않을까?
덧붙임. 소설에도 읽히지 않는 책이 등장한다. 첫 번째 //이럴 거면 내가 뭐하러 학교에서 괴테를 암기하고 그랬을까요?//하고 과부 신세를 한탄하는 <그녀>의 죽은 남편이 부모님에게서 졸업선물로 받은 가죽장정의 괴테전집이다. 이 책은 매 장마다 죽지 않고 전쟁을 다 겪어낸다. 책은 오래 오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