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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Jun 11. 2021

소설의 마법

마법사들 / 로맹 가리


열 살 즈음, 안방에 굴러 다니던 『별들의 고향』으로 소설 읽기에 입문했다. 


한글 떼고 첫 책 [세계위인전집] 읽고 케말 파샤에 빠져 여군이 될까 고민도 했지만, 그 후로 읽어낸 소설들 덕분에 주제 파악 잘하고 다른 길을 찾아 다녔다. 


나는 소설이 필요했다. 


언니들은 사랑이 뭔지 한 마디도 알려주지 않고, 어머니는 집 앞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언니 오빠들이 화염병 사이를 뛰어다니는 걸 보고 있는 내 앞에서 창을 닫았다. "삶이란 무엇인가" 질문만 가득한 소설이 정답이 하나 뿐인 수학 문제집 보다 쉽게 읽혔으니 아이러니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자기 앞의 생』으로 콩코르 상을 받았고, 권총으로 자살한 후 그 내용이 알려진 작가 로맹 가리. 파리에서 말 하나 통하지 않는 미용사에게 내 머리를 맡겼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프랑스 예술가에게 내 마음을 열어보기로 했다.


긴 호흡의 문장들, 절묘하게 이어지는 은유의 고리, 18세기에서 19세기를 이어지는 유럽의 변혁 시대 역사적 인물들의 소환(창문 넘어...백 세 노인_이 떠오르는), 12살에 아버지의 어린 아내를 첫사랑의 연인으로 품고 유년의 상상력을 잃지 않고 불멸의 삶을 사는 작가가 된다는 설정까지. 


재즈를 처음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패턴 없이 연주의 결을 드러내는 비트에 익숙해지니 등장인물들이 눈 앞에서 인생을 연주하는 것 같다. 소설은 음악처럼 빠져든다.



우리 직업의 본질은 인간들이 그들 욕망의 대상과 바람이 나도록 돕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욕망의 대상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꿈꾸게 만드는 것, 그것은 토대를 버리는 것이다. 이 교훈을 나는 한참 나중에 받아들였다


표트르 대제가 모스끄바의 문을 열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절, 권력자의 뒤(변비)를 봐주는 마법사가 있다. 주세페 자가는 러시아에 정착한 베네치아 출신 곡예단 가족의 수장으로 상상력의 나라에 사는 아들에게 가업을 가르치며 마법과 현실의 굴레 속에서 미래를 보는 눈을 열어준다. 그는 아버지 레나토 자가가 비밀의 유산으로 남긴 두꺼운 가죽 장정의 책을 아들(화자)에게 보여준다. 



이 책 속에서 너는 우리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현실이 네가 가는 길목에 던질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라는 의문과 부정의 온갖 덧을 피하는 게 필요한 힘을 길어낼 수 있을 거야.



일곱 페이지의 완전한 백지 뿐이다. 



백지는 아직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고, 아무 것도 잃지 않았고, 모든게 아직 창조하고 실행해야 할 상태로 남아 있다는 의미지.그러니 희망으로 가득한 거야. 그 백지들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르쳐주는 거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이 문장을 내 명함에 새겼다. 



나는 깨달았다. 아무 것도 아직 쓰이지 않은 그 마법의 페이지들에서 올라오는, 인생 여정의 우발적 사건들과 사고들 따위는 아랑곳 않는, 저항할 수 없이 당당한 희망의 엄청난 크기를



맹목적으로 걸작만을 추구하는, 소설의 하인을 자처하는 로맹 가리. 


소설이란, 인물들 속에 시대와 철학을 녹여 독자에게 문체라는 리듬에 얹어져야 제대로 즐길만하지_라는 깐깐한 독자에게 [마법사들]로 완전한 백지 위에 희망의 언어들을 채워 보여준다.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를 곡예와 마술과 협잡을 넘나드는 인물로 분장시켜 러시아라는 무대 배경 위에 올려놓고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로맹 가리의 이야기. 448 쪽을 아껴가며 넘기게 했다. 


덧붙임 : 언젠가 1년의 시간을 붙잡고 소설읽기만 해볼 생각이 있다. 그 때를 위해 로맹 가리를 전작읽기 리스트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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