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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May 26. 2021

상상, 소설 그 너머

흑산黑山 / 김훈


역사는 상상이다. 


지금의 내가 그 때의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귀를 여는 일이니까. 기록에 기대어 시대를 읽어도 쓴 이의 뜻이 다르면 같은 사건을 다르게 안다. 역사 교과서 논란은 그 단편이다. 어릴 적 내가 집에서 돌아다니던 책, 이광수의 소설 <有情>을 집어읽고 감동받은 탓은 철부지여서가 아니었다. 그 다정한 소설 제목이 품은 뜻을 바로 알았을 때는 여러 번 대통령이 바뀐 뒤였다. 


역사적 인물을 문학으로 소환한 소설은 위험하다. 화살과 박수를 이겨내야 한다. 읽지 않고 총 쏘는, 이념의 별을 단 카우보이들의 재물이 되기도 한다. 소설은 소리 없는 피 흘림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역사는 스토리를 입고 살아난다. 


정약용 일가에 대해 막연했던 내 지식은 신유박해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 黑山으로 선명해졌다. 피 흘림과 기도가 씨실과 날실로 이어진 듯 읽혔다. 가상의 인물에 호흡을 불어넣은 김훈 선생의 문장을 필사하며 시대를 깊게 상상했다. 한 쪽이 손 끝에서 넘어갈 때마다 삼백 년의 시간이 나에게 흘러 들어왔다. 


하늘을 주인으로 삼고 하늘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믿었던 이들의 피는 조선의 산하에서 검게 흘렀다. 그들의 믿음은 서로를 깨우쳤고 귀한 자는 천한 자의 말을 마음에 받았다. 황사영은 육손이와 마도리의 영혼에 의지했고 정약전은 창대와 순매에게 몸을 기댔다.  


나는 김훈 작가가 만들어준 삼백 년 전 사람들을 그려보았다. 마노리는 말 냄새가 났고, 문풍세를 읽으면 바다 냄새가 진동했다. 문장 사이에 풍기는 생생함은 내가 배운 역사와 믿는 신앙에 낀 묵은 때를 부끄럽게 했다. 


소설로 역사책 너머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馬路利, 吳東姬, 黃嗣永, 박차돌, 육손이, 昌大, 丁若銓, 文風世, 그리고 순매


길을 걷던 마도리의 몸을 바라본다.


//훌륭하다. 먼 길을 오고 또 가는 일은 아름답다. 말을 끌고 건너갔던 모든 들판 길과 산맥을 넘어가는 고갯길, 눈 쌓인 길들과 바람 불던 길들이 마노리의 눈 앞에 떠올랐다. 마노리는 그 길들 위에서 오가는 일의 놀라움을 혼자서 새기고 있었다. //


흑산을 자산(玆山)으로 여긴, 정약전의 바다를 그려본다.


//거기, 그렇게 있을 수 없는, 물과 하늘 사이에 흑산은 있었다. 사철나무 숲이 섬을 뒤덮어서 흑산은 검은산이었다. 멀리서부터 검푸른 숲이 뿜어내는 윤기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바람에 숲의 냄새가 끼쳐왔다. //


황사영이 기다리던 천주는 그의 손을 잡아준 군주보다 따뜻하길 바래본다.


//황사영은 그 기도문이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라고 생각했다. 모든 간절한 것들은 몸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 때 황사영은 알았다. 그리고 그 간절한 것들은 곧, 그리고 가까이서 다가오고 있었다..//


파도를 거스르지 않는 문풍세는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일에 이유가 없음을 알았다.


//너는 무죄다, 라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사람은 무죄인 것이었다. 그 무죄한 자들을 데려오는 길은 멀고 또 멀어서 아무도 갈 수 없는 바다를 건너가는, 먼 길을 가는 자의 소임일 것이라고 문풍세文風世는 생각하고 있었다.//


논리로 말하지 못하고 옮겨 적는 부족한 독자는 그저 상상하고 돌이켜본다.


내가 가는 길과 바라보는 일에 나태함과 욕심은 없는지. 내가 소망하는 하늘나라와 살아내는 땅 위 삶에 어긋남은 없는지. 소설로 상상하는 내 눈이 세상의 먼지로 탁해지지 않도록 애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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