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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Jun 12. 2021

아마도 소설 속에서 당신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은 위험하다. 


등장 인물 이름도 외울 수 없는 러시아 소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대가 배경이라면 책 표지 조차 열어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천사백 페이지의 소설을 읽어야 할 의무는 없다. 작가가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또예프스끼라도 스마트폰 앞에서는 무력한 시대가 아닌가.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까라마조프, 표도르 따블로비치 까라마조프.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띠 솟는 더위에 목침 대용으로 딱 맞는 두께의 책을 끼고, 

발음은 맞던지 말던지 소설 인물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러시아인의 이름은 그의 근본을 말해준다. 도스또예프스끼 씨네 미하일의 아들 작가 표도르는 까라마조프 씨네 표도르의 아들 알렉세이를 주인공으로 지정한 이유를 소설 서문에서 밝힌다. 알렉세이가 오십 대 중반에 낳은 자신의 늦둥이 아들 이름이라고 말해주지는 않지만, 충분한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 다른 등장인물이자 모든 사건의 발단인 까라마조프 씨네 아버지 이름은 작가의 이름과 같은 표도르이니까.


이름은 스토리의 출발이자 마무리다. 


성경에서 인물의 이름은 스토리텔링의 열쇠다. 주인공의 姓인 까라마조프 Karamazov란 본래 <검다>를 의미하는 중앙아시아 어의 <하라 hara> 와 <바르다>란 의미의 러시아어 <마자찌 mazat'>의 결합어_라는 해설이 독자에게 힌트를 준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소설을 시작하면서 선과 악을 드러내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나 선택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해석의 몫이 있다는 것을 서문에 고백한다. 


아마도 당신은 소설 속에서 스스로 찾게 될 것입니다.



모든 문학이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작가들이 숙제처럼 내주는 것 같아 읽기가 부담스럽다고 소설을 멀리하는 이들도 많다. 정답에 문제풀이까지 친절하게 내놓는 책 읽기도 바쁜데 왜 우리는 소설을 읽어야 할까? 지적 만족도를 높여주기 보다 고민이 늘어가게 하는 소설에서 뭘 찾을 수 있을까?



소설은 발견하는 자의 것이다. 


소설 읽기는 작가의 진액을 빼먹고 내 땅을 차지하는 확실한 남는 장사다. 텍스트를 읽어가는 중에 독자는 이미 발을 들여놓았고 홍해를 건넜다. 소설은 안전한 출애굽기다. 12지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모세가 될 수도 있다. 독자는 전지전능한 시점으로 다리 아프게 일주일 동안 성벽을 돌지 않고 한 마디도 외치지 않아도 가나안성벽을 무너뜨린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복되다. 


작가의 생명을 빨아 자신의 생을 연장한다. 도스또예프스끼와 같은 대 문호의 소설을 읽으며 시대와 역사와 정치와 종교 속에 녹아있는 인간의 중심을 해부하고 이식하는 명의의 수술을 받을 수도 있다. 도스또예프스끼는『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바친 삼 년을 마무리 하며 "이십 년은 더 살면서 글을 쓸 작정입니다."라고 호언했지만  3개월을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작가의 목숨과 바꾼 소설을 나는 감히 삼 주 만에 읽고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도스또예프스끼는 백삼십구 년 후 남쪽의 작은 나라의 작가도 스스로 찾게 될 소설을 썼다고 자신 했을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소설은 독자에게 어느 문이나 열 수 있는 열쇠를 넘겨주면서 한 가지 코드를 알려준다. 코드의 명령어는 다음과 같다. 


당신을 비추시오



나는 처음 읽은 소설의 스토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느낌은 아직 내 안에 남아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어른들의 이야기를 읽고 놀란 가슴은 오래도록 두근거렸다. 사춘기에 하이틴로맨스는 전혀 하이롭지(?) 않은 사랑에 회의하게 했으며, 도서관에 쭈그리고 앉아 읽은 낡은 고전들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해?' 하며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느낌은 생각으로 바뀌고 쌓여가는 책들 만큼 삶이 쌓여갈 수록 소설은 온몸으로 읽는 인생과 역사로 바뀌었다.


표도르, 알렉세이, 드미뜨리, 이반. 


까라마조프 씨네 이름에 내 이름을 비춰, 말도 되지 않는 악한 망나니의 삶을, 시대와 역사에 녹여 비춰보는 과정이 나의 소설읽기다. 구경하는 사람은 고뇌하는 주인공의 가슴 속을 보려고 하지 않고 지나가기에 왜 드미뜨리가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죄인이 되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소설의 열쇠와 코드가 없는 독자는, 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설정을 빌려와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의 사건을 일 년 내내 연재하며 소설로 써야만 했는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단 두 눈으로 인생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를 얻는다.


우리는 능력의 작은 부분 만을 사용하며 살아간다. 


육체를 사용하여 땀을 흘리며 칼로리를 소비하는 매일의 삶은 반복하는 기능 외에 더 이상을 요구하지도 않는 친절한 삶이다. 감히 고난을 사모하는 위험한 믿음도 구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위로하고 누군가는 욕하며 함부로 잣대를 휘두르며 소리친다. 그래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 허무하고 고단해서 무관심해져 조그만 기계만 쳐다보고 귀를 막고 산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인생에서 발휘되어야 할 우리 안의 잠재된 능력은 소설 읽기로 발휘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내가 끝까지 추악한 세계에 살고 싶기 때문이란다 ... 추악한 세계가 더 달콤하거든. 모두 그 세계를 비난하지만 모두 그 세계에 살고 있고 남들은 몰래 그 짓을 하지만 난 드러내놓고 하고 있을 뿐이란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런 대사를 칠 배짱도 없는 이는 상상력을 덧입혀 인물들을 소환하며 소설 밖의 세상의 선과 악의 방정식에 대입해본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정답은 없지만 해답은 찾아볼 수 있는 소설읽기의 고전이다.


도스또예프스키 앞에서 좌절하지 말기를. 


소설가는 운명에 순종하는 글을 쓸 뿐 독자의 몫은 따로 있으니까. 차마 소설 속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소설을 읽어가는 시간은 과거의 소환이 가능하며 미래를 예언할 능력을 보장해주니까. 스토리를 제대로 저장하지 못해도 읽는 시간 동안 코드를 입력했다면 소설 읽기는 성공이다. 나를 비춰줘. 너를 읽을래. 그러면 우리를 알게 될 꺼야. 소설은 그런 거니까.



*덧붙임    

Karamazov의 <검다>를 의미하는 중앙아시아 어의 <하라 hara> 에서 떠오른 생각.

에디오피아 커피 중 Hara는 꽃 향기 가득한 품종이다.

커피는 붉은 열매의 씨앗을 태워 검게 만들고 갈아서 물에 우려 먹는다.

왜 도스또예프스키는 책의 시작에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적었을까?

모든 씨는 땅에서 죽고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커피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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