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에피소드
수술 후에도 에피소드는 이어졌다.
A. 우리 엄마 불쌍해
수술 후 호텔에서 머물며 쉴 때, 남편은 갑작스럽게 잡힌 행사로 일에 치이고 바쁜 시기였다. 서울 출장이 잦아 두어 번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다시 일을 하러 가기도 했다. 한 번은 둘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데 요즘 어머님이 불쌍하단다. 애들 보기 너무 힘드신 것 같단다. 이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어머님이 불쌍하지 않게 아이들을 맡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B.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
역시 수술 후 호텔에서 쉴 때, 저녁에 아이들과 통화를 하다가 첫째가 티브이를 보고 있다고 하길래 “매일 티브이 보면 안돼. 좀 줄여~”라고 이야기했다. 옆에서 어머님이 듣고 계셨나 보다. 전화를 바꾸시더니 “나는 (힘들어서) 그렇게는 못 한다”하고 하신다. 본인에게 애들 티브이 그만 보여주라는 잔소리로 들리셨나 보다. 어머님께 뭐라 말씀드린 게 아니라 아이한테 한 말이라고, 오해 마시라고 했다.
역시나 애들을 보느라 정말 힘드신가 보다. 애들은 안 맡기는 게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C. 너희 집 신발장에 있는 네 방한부츠 좀 빌려주겠니? 등
시부모님은 겨울에 일본여행을 계획하셨었다. 하필 내 수술 날짜가 있는 주였다. 신경이 쓰이셨던지 내 수술 이후로 날짜를 조정하셨다. 수술 후 내가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다녀오셨는데, 여행가시기 며칠 전, 집에서 쉬고 있는 오후에 어머님께 전화가 왔다.
신발장에 있는 내 방한부츠를 좀 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렇다. 어머님은 그 정도로 우리 집 살림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계셨다. 신발장 어딘가에 있는, 나도 신은지 오래되어 어디 있는지 가물가물한 내 방한부츠의 존재를 알 정도로. 그리고 그걸 빌려 신는 것도 스스럼없어하신다. (나랑 발 사이즈가 같다.)
한 번은 친정에서 쌀 20kg을 보내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 ’ 우리 집에 쌀이 떨어졌는데 너네 집 쌀이 많으니 좀 가져다 먹겠다 ‘ 고 하시던 때가 떠올랐다.
어머님께는 내 살림이 곧 본인 살림이었다.
아 번외로 시누가 우리 둘째 구명조끼를 가져 다 달라고 시아버지한테 얘기했는지 아침에 출근준비하며 밥 먹고 있는데 아버님이 헐레벌떡 우리 집에 오셔서 가지고 나가신 적도 있다. (물론 비번 누르고 들어오셔서. 나한테 말도 없이)
B. 다른 계획이 없으면....?
일본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셨을 때, 아이들이 보고 싶으셨나 보다.
내가 분명히 내가 집에 있는 동안은 내가 애들을 당분간 케어할 테니 안 도와주셔도 된다고 남편을 통해 이야기했는데, 카톡이 온다.
어머님: “잘 지냈지? 나는 집에 왔어. 오후에 하던 대로 하면 될까?”
나: “어머님~ 잘 다녀오셨어요? 당분간 제가 해도 될까요? 방사선 치료하면 이삼주는 못 볼 텐데, 제가 체력 되는 한 보고 싶어요.”
어머님: “그럼! 피곤하거나 일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해라”
나 “네, 감사합니다.”
(3분 후)
어머님: “애들 오래 못 봐서 보고 싶구나. 오늘은 마치고 내가 픽업해서 데려다줄게. 다른 계획 있으면 말해.”
......
할 말을 잃었다. 좋은 시어머니가 되고는 싶은데 애들 보고 싶으니 내 맘대로 하고는 싶고. 그런 거겠지. 평소대로라면 별말 없이 알겠다고.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 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 “둘째 말씀이시죠? 첫째는 알아서 오니 신경 안 쓰셔도 되고요. 둘째한테 오늘 제가 간다고 말해놓긴 했는데 어머님이 보고 싶으시다니 어쩔 수 없죠.^^ 그럼 픽업만 해주세요!”
내 뉘앙스를 느끼셨는지 답이 이렇게 온다.
어머님: “아니다. 그냥 네가 가거라. 엄마 온다고 생각하다가 내가 가니까 실망하더라. 시간 될 때 보면 돼”
역시나 평소 같으면 그냥 ’ 어머님 뜻대로 하세요~‘ 한번 더 했겠지만 이번엔 ’네 그럼 제가 할게요.‘ 하고 만다.
그 사이, 남편에게 대화를 캡처해 보내니 첫마디가
“조율해 줘?”
이다. 아니 됐고 당분간은 내가 할 거라고 분명히 전달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점심을 먹고 오기로 했다.
D. 집들이 초대
수술 후 이주쯤 지난, 서울에서 돌아온 첫 주말이었다. 시부모님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하신 지 3주쯤 되었나. 데려다 밥을 먹이고 싶어 하신다.
나는 굳이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그 번잡스러움이 싫었다. 분명 가면 식사준비도 같이 해야 할 거고, 얻어먹고 설거지 안 하기에도 마음이 불편했다.
메뉴도 고기를 구워 먹는 거여서 식단을 신경 쓰고 있는 나는 내키지 않았다. 굳이 싶은 생각에, 어머님 아버님 이사한 집에 가서 인사는 드리되 나는 밥은 먹지 않고 나오겠다고 했다.
남편은 그럼 메뉴를 바꾸면 되는 거냐고 했다. 아니 나는 나 때문에 그럴 거 없고 그냥 인사만 드리고 나만 먼저 나올 테니 애들 데리고 천천히 먹고 나오라고 했다.
남편은 기분이 나빠했다.
나보고 우리 엄마 아빠 앞으로 안 볼 거냐고 한다.
아니 나는 수술하고 집에서 쉬는 며느리 불러다 집들이하고 싶은 심리가 더 이해가 안 갑니다만.ㅠㅠ
참 원래 오실 때는 3년 반짜리(로 굳이 구하신...) 그전 전세만 끝나시면 다시 내려가실 줄 알았다. 나하고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슬쩍 새로운 전세를 구하셔서 거주를 연장하신 것도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아는 회사언니가 가까워지는 건 쉽지만 멀어지는 건 어렵다는 그 말이 정말 맞다.
아, 아니나 다를까 댁에 갔을 때 인사만 하고 나오려 했지만 집에 가니 아무런 식사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고, 어머님은 내 앞에 버섯인가 나물인가를 주시면 다듬으라고 하셨다. 저녁에 먹으려고 하는데 너도 좀 가져가서 집에서 먹으라면서ㅎㅎㅎ
E. 친정에 좀 가 있는 게 어때?
내가 병가를 쓰고 집에서 쉬는 동안 아이들을 온전히 보고 집안일 하며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남편은 그게 오히려 더 불편했나 보다. 아마 어머님이 계속 뭔가 해주시려고, 애들을 보려고 연락을 하는데, 그걸 내가 받아주지 않으니 중간에서 난처했을 거다.
어느 날은 나보고 당분간 친정에 가서 좀 쉬는 게 어떠냔다.
우리 친정부모님은 두 분 다 몸이 안 좋으시다. 매일 도우미 이모님이 오셔서 집안일 도와주신다. 내가 가면 쉬는 게 아니라 엄마를 도와 밥을 해야 할 판이다. 그걸 모르지 않는 사람이 나보고 친정 가서 “쉬는 게” 어떠냔다.
쉬고 싶은 건 본인이겠지.
시부모님을 우리 집에 마음껏 들락거리게 하고 본인도 본인 맘껏 야근하고 회식하게 말이다.
애들을 내가 온전히 보는 것도 마음이 안 들어하는 눈치다.
부모님 이제 다시 내려하시라 해야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아마 어머님이 이럴 거면 우리가 필요 없네. 그냥 내려가는 게 낫겠다며 남편에게 한 소리 하셨겠지.
나는 속으로 ’과연 진짜 내려가실까...?‘ 생각했다.
도대체 엄마가 애들을 온전히 보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쁘지?
애초에 내가 필요해서 오시라 요청한 게 아니었다. 나 빼고 모두에게 좋겠다 생각했을뿐. 그렇다. 나를 뺀 남편의 가족에게는 좋았던 거다. 내가 빠지는게 차라리 본인이 편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