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블랙 로펌 13화

암 걸리는 날

나를 엿 먹이는 메일에 답변하기

by 익명의 변호사
오늘도 계약서가 왔다. 수백 페이지짜리 계약서다.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법률상 문제없는지 대충 전반적으로 봐주세요"라는 멘트가 달려 있다.
-개노답 삼형제(첫째)


1.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무팀에서 일하게 되면 애를 먹는 것이 현업 부서와의 소통 문제다. 입사 후 초반에 계약서 검토, 자문 요청이 올 경우엔 절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막막해진다. 배경 설명이나 별다른 자료 없이 요청해오는 경우가 태반이라서다. 물론 대부분의 부서는 처음에만 이럴 뿐, 정식으로 보완 요청을 하면 서투르게나마 협조해오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게 안 되는 이들이다(이하 '개노답'이라 한다).


개노답들이 보내는 메일은 통상적으로 아무런 배경 설명이나 자료가 첨부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 '전반적, 전체적으로 법률상 문제가 없는지' 따위의 두루뭉술 얼레벌레, 있으나마나한 질의사항이 적혀 있다. 실제로 알고 싶은 게 뭔지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힘들게 하는 메일이다. 생각해야 할 점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사내변호사 홀로 법무팀을 꾸리는 곳의 경우에는 이런 문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지금까지 경험상 개노답들을 상대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기원전 17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함무라비 방식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 질문자가 궁금한 사항을 적어주지 않으면 답변자도 무엇을 답변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당연히 답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한정된 법무팀 인력과 시간상(8 to 10) 수천 종의 현행 법률을 모두 검토할 수야 없기 때문이다.


답은 하나다. 진부하지만 FM이다. 어떠한 점이 우려되는지, 가장 이슈가 되는 사항은 무엇인지 정보를 요청해야 한다(물론 이래서 되면 내가 글을 적지도 않겠지만). 답을 주지 않는다면 간단해진다. 더 이상 검토하지 않으면 된다. 답을 줬다면, 궁금한 점이 이러저러한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 메일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주고받는 내용을 여러 번 하여 무엇을 물어보는지 정확히 특정해야 한다. 이에 더해 워드 파일 본문에 아래와 같이 위 개노답이 특정해준 질의 내용을 적고, 이를 바탕으로 검토하였음을 명시해준다(아래 목록은 그 비굴한 문례이다).


본 의견은 당해 계약서와 관련하여 (개노답이 속한 부서)가 '(개노답의 질의 내용)'라고 질의 주신 사안과 쟁점에 국한하여, 실무진의 업무처리에 도움을 드릴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상기 사안과 관련하여 (개노답의 부서 및 담당자:개노답)으로부터 아래와 같이 제공받은 사실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드립니다.

본 의견은 (개노답의 부서 및 담당자:개노답)이 제공한 하기 자료들이 진정하다는 전제 하에 작성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하 제공받은 자료의 목록.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빠른 시일 내에 엿을 먹게 될 것이다.


그것도 하기 싫거나 당장 바쁘다면 '왜 이리 늦느냐'며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질의사항이 명확히 특정되지 않아 제반 법령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무슨 법령을 기초로 어떤 부분이 걸리는지, 뭘 물어보고 싶은지 다시 물어보자. 급해진 개노답이 대답을 해주면 이를 메일로 달라고 하면 된다.


오 과장은 일이 틀어지자마자 "법무팀 검토 거친 건데요?"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쫑알거렸다.
-개노답 삼형제(둘째)


2. 의견 드렸으면 고쳐주세요


생각해보자. 메일을 보낸 실무진은 정말 계약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보냈을까? 정말 전반적인 법률상 문제점을 검토해달라고 법무팀에 '던져준' 것일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니다. 니즈는 단순하다. 개노답들은 계약서의 문제가 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법무팀 협의를 거쳤다는 '방패'가 필요할 뿐이다.


순진하게도, 예전엔 정말로 계약서를 전체적으로 검토해서 수십 곳의 법률적 이슈를 모두 메모로 코멘트해주기도 했다(정말이다. 중요하니까 두 번 썼다). 정작 거래 상대방에게 나간 메일이 법무팀에 처음 도착했던 메일과 달라진 부분은 오기 수정, 단 한 군데였다. 정작 크리티컬한 위약벌 부분이나 하자담보기간 같은 중요 조항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개노답들은 상당수가 상대방과 협의가 어렵다는 이유로 계약서를 고치려는 노력도 의지도 없다(물론 좋은 회사라면 이러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 어차피 예상되는 리스크가 누락되지 않고 코멘트가 나간 이상 그 계약을 체결하든 말든 내 월급에 변동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계약서 기안을 올리면서 '법무팀 협의 완료' 따위의 말이 적혀있으면 두 배로 화딱지가 난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 이거 사장님 컨펌된 건인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니가 더 곤란해요."
-개노답 삼형제(셋째)

3. '급행'은 없다


법무팀은 골키퍼다. 리스크 매니징을 목적으로 하는 설거지 부서다. 놀랍게도 이곳을 빠져나간 서류는 아무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근거 없는 믿음이다. '법무팀이 이미 본 서류다'라고 하면 일사천리로 OK다. 여러 사람이 봤다고 오류가 걸러지리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집단지성 따위를 믿지 않는 이유다.


애초에 '급행' 따윈 없다. 계약 엎어지면 책임질 것이냐고 윽박지르는 개노답도 있다. 물론 책임은 그 개노답이 지므로 걱정하지 말자. 항상 급하게 진행하려는 건일 수록 항상 우리 회사에 불리하고, 사고가 나면 독박을 쓸 가능성이 높으므로 꼼꼼하게 봐야 한다. 팀장이 이렇게 코멘트하라고 시킨 거냐, 니 의견을 어떻게 믿느냐는 개노답도 있다. 상대도 하지 말자. 사장님, 전무님, 회장님 컨펌받은 건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알아서 기라는 것이다. 예 빨리 봐드릴게요, 라고 말한 후 더 유심히 봐야 한다. 정말이다. 리스크는 항상 예외에서 나온다.


그리고 글은 분노에서 나온다.


PS> 왜 #개노답 태그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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