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리뷰
월세가 5만원 올랐다. 해가 바뀌니 담뱃값도 2000원이나 올랐다. 내가 늘 마시던 위스키 값마저도. 모든 것이 오르는데 달라지지 않는 건 내 수입뿐이다. 또 한 가지, 바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 ‘담배’, ‘위스키’, ‘연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조금씩 빼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월세방부터.
<소공녀>는 가난한 주인공이 길을 떠나며 다양한 일을 겪는 일종의 로드 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월세방을 뺀 ‘미소’는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시절 밴드 활동을 함께 했던 다섯 명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미소’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재회하며 반가워하지만 예전과 달리 변한 친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떤 친구는 직장생활에 힘겨워하고, 누구는 결혼해서 시댁 눈치를 보고, 누구는 이혼하고 아파트 빚에 시달리는 등 친구들은 현실의 벽과 마주해 어려움을 겪는다. ‘미소’의 남자친구이자 웹툰 작가 지망생인 ‘한솔’ 또한 번번히 공모전에서 떨어지기만 한다.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지만 ‘미소’는 홀로 남아 꿋꿋이 자신이 아끼는 것들을 지키려 한다.
'미소'는 부자 남편에게 시집 간 친구의 집에서 머무르며 그럭저럭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월세방까지 포기하며 지키려했던 '한솔'이 웹툰 작가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는 것을 알게 된다. ‘미소’ 자신 또한 남편의 눈치를 보는 친구에게 쫓겨나고 만다. '미소'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가난한 ‘미소’는 끝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어쩌면 <소공녀>는 경제학의 기본개념인 기회비용에 대해 가장 잘 말해주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가도 오르고 친구들도 변했다. 하지만 '미소' 자신과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현실 속에서 한 개인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힘겹게 투쟁하는 과정이자 현대 사회 속 가난한 젊은이의 극단적 초상이다. 누군가는 변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한심하게 생각한다. 고작 술과 담배를 위해 집을 포기하고 떠돌아다닌다고? 하지만 그 가치들은 그녀에게 한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의식주는 ‘미소’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화는 남들은 비록 하찮고 사소하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는 노력을 담아낸다.
어떻게 보면 아주 처절하고 구슬픈 이야기지만 영화는 가혹한 현실에 놓인 주인공의 모습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하지만 동화적인 분위기의 영화는 동화적 결말로 이어지지 못한다. 결국 '미소'는 휴대폰도 끊기고 약을 먹지 못해 머리도 백발이 된 채로 집도 없이 텐트에 지내며 산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가치들을 지키며 살아간다. 조금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이 결말은 영화가 현대 사회에 대한 지독한 우화임을 보여준다.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오는 요즘, 빼는 삶에 대해 다루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뺄 수 없는 소중한 가치에 대해 극단적인 예를 들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중반 이후의 사건들에 있어 지나치게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친구네 집에 갔다가 아들을 결혼시키려는 친구 부모에 의해 집에 갇히거나 '미소'가 결국 한강변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설정 등은 조금 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공녀>는 가치를 지키고 살기 힘든 시대에서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려는 젊은이의 초상을 잘 그려낸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미소’를 보면 말 그대로 미소가 절로 나온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위스키 한 잔에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연출 의도에서 전고운 감독은 담배를 사랑하고 있거나 한때 담배를 사랑했던 사람들, 월세가 없어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 하고 싶은 일을 하느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춥고 지독한 서울에서 만난 게 그래도 반갑다는 말이 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가난한 독립영화인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베테랑>의 명대사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실제로 영화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라고 한다. 감독은, 비록 힘들고 돈도 못 벌지만 그것보다 소중한 것이 영화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