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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Jul 01. 2019

노트북이 고장났다

불행 전시관

 노트북이 고장났다. 2013년도부터 쓰던 노트북이다. 군 제대 이후에 하드디스크가 뻑나서 꽤 오래 못 쓰던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땐 하루 중에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있긴 했다. 그때 거금 10만 원가량을 투자하여 SSD로 교체한 이후, 지금까지 주인의 끝없는 혹사에도 잘 버텨왔던 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토요일에 노트북을 켜니 전원이 안 들어온다. 하필 주말에, 하필 주말까지 노트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미뤄왔던 나에게. 나는 패닉에 빠졌다. 노트북 메인보드가 나갔거나 하면 수리할 돈도 없다.
 돈이 없다. 거의 한 주간 별로 사람새끼처럼 살지 못했다. 불과 칠 전까지만 해도 쓸 만큼 있었는데, 과소비를 한 것도 아닌데. 집에 조금만 도움을 구해볼까? 그런데 그때, 고향에서 연락이 온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돈 없냐고, 가족에게 도움을 구하기는 글렀다. 오히려 빚이 늘었다. 이제 7월 1일부터는 3주간 사회복지관에서 9 to 6로 일해야 한다. 아 참고로 내가 돈을 내고 다녀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졸업을 하려면 이 실습을 해야 한다. 더 미룰 수도 없다. 당장 생활비가 문제인데 실습 때문에 일을 할 수도 없다.
 노트북이 고장났다. 그 와중에. 일한 돈은 들어오지 않고, 돈도 없고, 빚이 늘어가고 뭘 할 수도 없는 참에. 노트북이 없으면 글을 못쓴다. 얼마 전까지 작은 수첩을 들고 다니던 나는 이제 거의 모든 기록 활동을 전자기기로 옮겼다. 1~2개월 전에 문서들은 백업을 해놓긴 했지만 최근에 쓰던 글들은 노트북에 있다. 난 문제를 직면하고 대처하는 것이 매번 서툴다. 이럴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일단 좌절하고 회피하는 것. 하루 동안 그 과정을 거친 이후에 겨우 기운을 내서 카카오맵을 뒤지며 동네를 떠돌았다. 하지만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주변의 컴퓨터 수리점들은 이미 다 사라진 지 오래다. 내 노트북은 너무 오래됐고 A/S도 그리 좋지 않은 브랜드인 데다가 A/S센터를 가려면 토요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대개 A/S센터는 6시까지만 하니까. 일하는 첫 주차인데 중간에 잠시 나오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안 좋은 일들은 꼭 한꺼번에 밀려온다.
 난 심하게 고양이과다. 영역 동물이고, 익숙한 것들과 루틴이 망가지면 크게 불안해진다. 노트북이 사라지면 당분간 PC방에 가거나 학교 컴퓨터실로 가야 하는데 이건 내 패턴과 공간에 큰 변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내 소유의 전자기기가 아닌 것에 내 흔적을 남기는 걸 매우 꺼린다. 예를 들면 로그인이라던가...
 안 그래도 무기력한 삶이 더더욱 무기력해졌다. 어쩌면 차라리 내일부터 실습을 시작하는 게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생각은 아주 조금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의욕도, 의지도 모두 사라진다. 이때 다시금 바틀비를 떠올린다. 아, 사실 원래 두 번째 글로 바틀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글은 쓰지 않는 걸 선호한다. I prefer not to write that인가 영어로. 난 항상 모던해지고 싶고, 그런 글을 쓰고 싶은데 정작 사는 거나 쓰는 거나 더 비루해져만 간다. 그리고 여기서 무언가를 하지 않고 싶다. 이런 상태가 되면 꼭 이 말을 해야 한다. 그러면 비록 비루해도 뭔가 있어 보이니까.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가난의 전시, 빈곤 포르노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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