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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Jan 27. 2020

<아이리시맨>, 스콜세지, 그리고 시네마

영화 <아이리시맨> 리뷰

배교자’ 스콜세지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특히나 <아이리시맨>의 경우, 이 과정이 필수다.

 이 영화의 제작 소식을 듣고 가장 놀란 건 로버트 드니로와의 재결합이나 알 파치노와의 첫 호흡이 아니라 마틴 스콜세지가 새로운 플랫폼인 넷플릭스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알려진 대로 스콜세지는 영화인 중에서도 유별난 영화 매니아고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스트리밍을 메인 플랫폼으로 하는 넷플릭스와 손잡았다. 물론 직전 영화 <사일런스>의 흥행 실패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어쨌거나 스콜세지가 이걸 받아들였다는 건 넷플릭스를 영화의 새로운 흐름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의미한다. 

 이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스콜세지는 자신이 연출한 <사일런스>의 포르투갈 신부처럼 ‘영화=극장’이란 기존 전통의 ‘배교자’가 됐다. 넷플릭스가 스콜세지라는 거장을 영입하며 노리는 효과도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내심 기대했던 건 이를 통해 영화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넷플릭스 영화 <로마>가 극장 제한 상영이라는 일종의 ‘꼼수’로 아카데미 주요 부문을 수상하자 스티븐 스필버그가 처음 문제를 제기했다. 요지는 “‘넷플릭스 영화’는 그냥 ‘영화’가 아니라 ‘TV영화’이니 오스카 말고 에미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란 당시 침묵을 지키던 스콜세지는 마침내 <아이리시맨>의 초기 언론 상영 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더 본연적인 질문을 던졌다. 바로 ‘시네마’(Cinema)에 대해서다. 현대의 프랜차이즈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은 시네마가 아닌 테마파크에 가깝다고.


 이후 언론의 자극적인 프레임이 기름에 불을 붙여 발생한 수많은 논쟁에 대해 다 다루기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분명한 건 <아이리시맨>은 스콜세지가 생각하는 ‘시네마’의 형태 중 하나고, 이 영화에는 그가 왜 배교하고 넷플릭스로 떠났는지에 대한 일종의 항변(또는 자기변명)이 담겨 있을 거란 사실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느낀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두 가지가 영화에 다 담겨 있었다.


영화적 체험


 처음 제작할 때부터, 이 영화는 지미 호파를 죽였다고 고백한 프랭크 시런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했었다.

 ‘프랭크 시런이 지미 호파를 죽였다’

 <아이리시맨>의 한 줄 시놉을 아무리 길게 적더라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말로 따지면 <아이리시맨>은 애초에 찍기 시작할 때부터 ‘스포’를 미리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프랭크 시런이 지미 호파를 죽인 내용일 게 뻔하니까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을까?

 <아이리시맨>에서 중요한 것은 ‘프랭크 시런이 지미 호파를 죽였다’가 아니다. 영화는 3시간 29분의 러닝타임 중 지피 호파를 죽이게 되는 그 자세한 과정에만 1시간을 넘게 할애한다. 즉, ‘프랭크 시런이 지미 호파를 죽였다’는 사실에 다다르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를 감상하는 건 그 과정, 시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영화적 체험’, 그것은 스콜세지가,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네마의 의미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극 중 호파의 대사처럼 “이렇게 보면 아주 간단한 문제”다.


아이리시(Irish) = 이방인


 ‘순수’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스콜세지의 갱 영화는 항상 순수 이탈리아계가 아닌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조직의 중심, 고위층(Higher-ups)으로 가지 못하는 주변인들이다. 스콜세지는 인물들에게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넣음으로써 항상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좋은 친구들>의 인물들은 일당 중 유일한 순수 이탈리아계 토미를 조직에 넣으려고 애쓰는 뒷골목 갱들이고, <카지노>의 에이스 역시 유대계라 중간 하수인 이상으론 가지 못한다. 여기에 더해 건국 초기 토박이(네이티브)들에 텃세에 맞서 자신의 터전을 잡아가는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의 이야기(<갱스 오브 뉴욕>)와 보스턴에 자리한 아일랜드 갱들의 이야기(<디파티드>)를 다루기도 했다.

 <갱스 오브 뉴욕>의 암스테르담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토박이 빌을 죽이려 하나 오히려 그에게서 아버지의 품을 느끼게 돼 갈등하고, <디파티드>의 빌리는 어머니와 사는 평일에는 중상류층 도련님으로 아버지랑 지내는 주말에는 뒷골목 하류층으로 살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다.

 <아이리시맨>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에는 두 명의 ‘아이리시’가 등장한다. 순수 이탈리아계로만 이뤄진 마피아 조직에서 참전 경험으로 학습한 이탈리아어 덕에 메인 히트맨 자리에까지 오른 프랭크 시런과 전미 노조의 우두머리 지미 호파. 다시 말해 ‘아이리시맨’ 프랭크 시런이 ‘아이리시맨’ 지미 호파를 죽인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아이리시’인 프랭크는 조직의 고위층과는 닿을 수 없다. 그에게는 조직과 호파의 중간을 오가는 연결망 이상의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아일랜드계 호파와 인간적으로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되지만 오히려 이 관계 또한 조직에서 호파를 죽일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다.


현대 시네마의 아이러니


 앞서 말했듯, 스콜세지가 “영화가 아니다”에서 언급한 ‘영화(Cinema)’라는 단어에 의미에 대해서나, 스필버그가 “‘넷플릭스 영화’는 그냥 ‘영화’가 아니라 ‘TV영화’”라고 한 것에서 언급되는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 논할 거리는 끝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작품은 그 어떤 의미에서든 ‘영화’고 ‘고전(Classic)’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209분짜리 긴 갱 영화에 거액을 투자할 영화사는 없다. 이런 영화는 돈이 되지 못하니까. 돈 안 되는 영화들이 극장에서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것이 스콜세지가 넷플릭스로 ‘배교’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에서 ‘고전’을 만들려면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야 한다. 기막힌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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