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와 디자이너를 위한 업무분장 "디자이너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아니다"
기획자 혹은 디자이너라면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피드백을 들어야만 하고 어떻게든 수정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한 번에 완벽하게 결과물을 만들어서 단 한 번의 수정 없이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클라이언트와 기획자, 디자이너가 모두 한 곳에 모여서 결과물을 위해 세밀하게 기획을 하고, 초반 단계부터 모두 함께 참여하여 결과물에 대해 논의를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은 클라이언트가 작업을 의뢰하고, 기획자가 기획을 하고,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하는 프로세스이다.
※ 클라이언트가 내용을 기획하여 대행사에 의뢰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행사에 의뢰하여 진행하는 경우로 프로세스를 설명해보았다.
1. 작업 의뢰
2. 디자인 기획
1) 내용 기획: 대행사의 기획자가 클라이언트와 협의하여 내용 기획을 진행한다. 제품 카탈로그라고 예를 들면, 제품 라인업부터 시작해서 <각 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들어갈지에 대한 원고 기획>을 한다.
2) 디자인적 기획: 내용 기획에서 완료된 원고를 가지고 디자인적 기획을 진행한다. 경쟁사 조사부터 디자인 벤치마킹을 한 뒤 <이 기획안을 어떻게 디자인적으로 잘 풀어낼지 고민한 뒤 디자인을 진행>한다.
3. 디자인 시안
앞단의 기획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진행하고, 작업이 완료되면 원고와 디자인을 대조하여 내용을 체크한다. 그리고 내용을 기획안 담당자가 최종적으로 내용을 체크하여 클라이언트에게 시안을 전달한다.
4. 디자인 수정
이 단계에서는 디자인 콘셉트 자체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탈자 및 내용 수정 등 디테일 요소를 다듬는다.
5. 디자인 제작(아웃풋)
디테일 요소를 모두 다듬은 뒤 최종으로 디자인 결과물을 완료한다. (이미지, PDF 파일 등)
이처럼 디자인에는 프로세스가 있고, 그 단계마다 각각의 담당자들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이행해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디자인을 작업하기 위해선 raw data가 있어야 하고, 디자이너는 그 raw data를 가지고 디자인을 한다. 또한, 그저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 이 내용이 어떻게 디자인적으로 잘 보이게 할지 경쟁사 조사, 디자인 리서치 등의 <디자인적 기획>을 한다. 그저 주어진 원고대로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디자인적 기획 단계를 거쳐 디자인에 대해 고민하고 작업을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와 기획자의 업무분장은 더욱더 확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위에서 나온 내용 기획과 디자인적 기획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을 해보면
1) 내용 기획
내용 기획을 하는 사람은 보통 클라이언트나 기획자이지만, 내용이 많지 않은 경우(몇 페이지 안 되는 디자인이거나, 한 장의 포스터 디자인 혹은 리플릿 같은 경우)엔 디자이너가 직접 진행하기도 한다. 내용 기획을 하는 담당자는 디자이너에게 원고를 넘기기 전에 오타는 없는지 제품명은 제대로 되어있는지 다시 한번 꼼꼼하고 세밀하게 검수를 해서 디자이너에게 넘겨야 한다. 그래야 디자이너는 기획자가 작업한 내용을 토대로 디자인을 진행할 수 있다. 원고가 잘못되어 있다면 디자이너는 우선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물론 디자이너가 잘못된 부분을 체크해서 먼저 제시할 수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내용을 기획한 당사자가 최종적으로 자신의 원고에 이상이 없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맞다.
2) 디자인적 기획
간혹 그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아니 디자이너가 기획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오타 검수도 하는 거 아닌가요?"
물론 이 말을 듣고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은 했지만, 아직도 이렇게 묻는 분들이 많아서 사실상 업무 할 때 곤란함을 겪는다. 예전에 제조 업체의 제품 카탈로그를 진행할 때 기획 원고대로 디자인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디자인이 완료된 뒤에는 원고와 디자인 결과물을 대조해보며 오타가 있는지 검토를 하였고, 그다음 기획자가 다시 재검토를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원고 자체에 오타와 잘못된 내용이 있었는지 클라이언트가 기획자에게 컴플레인을 걸었다. 그리고 그 뒤에 그 기획자는 클라이언트에게 들었던 화를 나에게 분출하는 듯이
"아니, 디자이너님 내용이 잘못되면 그걸 디자이너가 고치고, 오타 검수도 해야 맞는 거죠"
"저기요 기획자님, 본인이 실수해놓고 왜 그걸 캐치하지 못한 디자이너에게 분풀이하시죠?"
동등한 관계였다면 물론 이와 같이 얘기했겠지만, 나이 차이가 많은 상사라서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직급으로 누르는 듯한 말투는 참을 수 없이 너무가 화가 났고, 자신이 실수해놓고 괜히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한편으로는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고는 제대로 되었지만 디자이너가 체크하지 못했다면 그건 디자이너의 실수임이 분명하고, 그와 달리 원고 자체가 잘못된 경우는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1) 누가 봐도 오타인 듯한 느낌이라면 디자이너가 체크하는 것이 좋다.
ex) 앙녕하세요, 2021년 12월 311일 연하장, 햄복한 하루 보내세요 등
-> 하지만 이거를 체크하지 못했다고 해서 디자이너의 <잘못>이라곤 할 수 없다. 만약 디자인을 빨리 쳐내야 하는데, 오타 하나하나까지 모두 신경 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오타 검수는 디자이너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여러 명의 디자이너와 기획자 등이 더블 체킹을 해야 하는 것이다.
2) 제품명, 외국어 등 기획자만 알 수 있는 내용이라면 기획자가 체크하는 것이 맞다.
ex) 고객사의 제품명, 기획한 사람만 알 수 있는 어려운 단어, 외국어 등등
크리에이터로서 그 말을 듣는다면 아마 머릿속은 태풍이 몰아친 듯 어지러워질 거라 생각한다. 간혹 나 또한 디자이너 경력자로서, 디자인 외에 기획단계도 참여하여 여러 업무를 하고 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달다는 요청도 있고, 대충 말하더라도 한 번에 완벽하게 만들어달라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누군가는 자신이 실수를 해놓고 나에게 "왜 체크하지 못하지? 센스 없네" 라며 순식간에 매번 실수하는 디자이너로 만들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런 말을 들었다면 딱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그저 그 사람들은 디자인과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니 천천히 하나씩 알려주면 된다.
알 잘 딱 깔 센 디자인 해주세요 → 그런 디자인은 없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기획단계를 거쳐볼까요?
심플하고 화려하게 느낌 있게 알죠? → 심플하면서 화려한 건 없습니다. 콘셉트는 한 가지만 가능합니다.
오타 검수 완벽하게 해 주세요 → 최종 오타 검수는 담당자님도 "같이" 체크해주세요.
글씨랑 이미지는 무조건 크게 → 무조건 크게 배치하면 시각적으로 이상해질 수 있는데 괜찮나요?
디자이너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아니라 근거 있는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디자인적으로 잘 보여지게 할지 고민하는 전문 직업이다. 그저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디자인을 해달라는 건 '내가 마음에 들 때까지 디자인해봐'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즉 이와 같은 말은 어찌 보면 갑의 입장에서 편하게 해 버리는 말이지만, 그런 말을 들은 디자이너들(혹은 크리에이터)은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것이다. 아마 전 세계 1위 유명한 디자이너일지라도, 엄청나고 저명한 사람일지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을 접하는 직무라면 처음은 어려울지라도, 천천히 디자인에 대해 알아가며 말 한마디로 인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는 업무환경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