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스타트업이라는 이름만 들었을 때는 매우 열정적이고 세상을 바꾸려는 자들이 모여서 "으쌰 으쌰! 너도 우리 배에 탑승하지 않을래?" 하는 느낌이 든다. 왠지 스타트업 사무실에 가면 좋은 스피커로 힙한 노래를 틀어놓고, 직급 파괴 구조로 다 같이 영문 호칭을 부르며, 자유로운 회의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업무능률이 200%오를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약 7년간 디자이너로 지내면서 아주 짧은시간이지만 스타트업을 3번 경험했다. 그리고 그 기업이 신입, 경력 디자이너인 나에게 바랬던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인재상]
1. 주어진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인재
2. 자기 업무분야 외에도 다양한 업무를 하려고 하는 인재
3. 디자이너이지만 기획적인 능력을 갖춘 인재
[업무역량]
1. 프로세스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일단 빠르게 쳐내는 스킬
2. 유관부서와의 업무를 위한 유연한 커뮤니케이션 스킬
3. 자신이 한 업무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설득할 수 있는 스킬
4. UI/UX, 웹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브랜딩 디자인, 온오프라인 디자인,
마케팅 콘텐츠 디자인, 시장조사.. 가능하면 사무보조까지 (?)
[근무조건]
1. 면접 후 협의(보통 연차에 따른 연봉 협의 가능성이 높다.)
2. 회사 내규, 면접 협의 (100%는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연봉 후려치기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바라는 인재상을 쓰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은 저 업무를 모두 다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만약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 당신 회사를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다. 위의 업무를 모두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무엇이 부족해서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에 지원하여 연봉을 후려치기 당하며 일을 해야 하는가? 스타트업은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를 채용할까 하는 생각에 기본적인 복지혜택을 지키며 그 외에도 직원들이 편하게 일을 하고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사내 시스템을 구현해야 한다. 만약 정상적인 복지체계조차 갖출 수 없는 여건이라면 직원을 채용하면 안 된다. 복지체계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다.
4대 보험, 계약서, 중식제공(필수 N0) 야근식대(필수), 야근 교통비 지원, 외근 교통비, 연차 및 휴가제도
만약 누군가 이 글을 보면서 "아니 스타트업인데 직원들한테 저 복지를 다 챙겨주라고?"라는 생각이 든다면 직원을 채용하지 말고 혼자, 혹은 동업자와 일하는 걸 추천한다. 아니 추천이 아니라 그렇게 일해라. 기본적인 요건 조차 갖추지 않으면서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 스타트업에 (연봉이 높지 않은) 좋은 인재가 올 거라는 상상은 감히 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동안 스타트업에서 들었던 말은 실제로 아래와 같았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꽤 좋은 프로세스와 좋은 인재를 둔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의 시작과 끝은"우린 스타트업이니까"였다.
"우리는 스타트업이라 체계가 없어요"
-> 체계가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앞으로 만들어나갈 생각을 하면 됩니다.
"스타트업에 주말이 어디 있나요. 그냥 미친 듯이 일하는 거죠"
-> 당신은 주말이 없겠지만 직원은 주말이 있어야죠, 직원한테 당신 월급 줄 수 있나요?
"스타트업이니까 정해진 일만 해선 안돼요"
-> 다양한 일을 접할 수 있는 건 좋아요. 대신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업무를 배울 기회와
완벽하지 않더라도 기다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주세요.
"스타트업이라 경력직이어도 신입 연봉 줄 건데 괜찮아요?"
-> 이럴 거면 면접 자체를 부르지 말았어야죠. 내 교통비 물어주실래요?
"스타트업이니까 우린 초기 멤버예요. 직원이 아니라 자기 회사처럼 일했으면 해요"
-> 직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는 할 수 있지만 내 회사가 아니라 당신 회사예요.
다시 한번 물을게요. 직원한테 당신 월급 줄 수 있나요?
"스타트업이니까 월급을 안 받고 일할 수 있나요? 대신 우리에겐 미래가 확실해요!"
-> 미래 분명히 중요하죠, 근데 이번 달 내 생활비는 어떡하실 건가요? 임금체불로 신고해도 되나요?
이렇게 글을 써놓고 보니 너무 스타트업의 단점만 말한 것 같아서 조금 무거운 마음이다. 하지만 분명 단점만큼 장점 또한 존재한다. 자기 분야 외에 다양한 업무를 배울 수 있고, 새로운 분야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다. 또한 혼자 많은 일을 쳐내야 하기 때문에 아마 스타트업을 경험하고 다른 기업에 간다면 본인의 연차보다 좀 더 높은 역량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내가 위에서 직접 들은 말 들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들은 겉으로 잘 포장되어 있으며, 대외적으로 이미지도 좋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정작 내부에서 직원들을 대하는 마인드와 복지체계는 일반기업에 비해 매우 열약한 환경인데도 매번 스타트업임을 강조하여 직원들에게 열정을 강요하고, 입금을 착취하였다. 주위 친구들 중 간혹 아주 좋은 여건의 스타트업에 들어간 경우를 본 적 있지만 대부분이 안 좋은 기억만 가지고 퇴사를 하였던 기억이 난다. 아무것도 모를 신입 때에는 이런 부당한 것들이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연차가 쌓일수록 기업 속에서 잘못된 것들을 찾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주장한 적이 많았다. 어떠한 복지조건 조차 제대로 된 것이 없고 근로계약이나 임금 문제조차 잘못된 스타트업에게 업무환경 개선을 요구했더니 내게 돌아온 대답은 "좋은 환경만 바라시네요. 우린 스타트업인데"였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즉시 퇴사를 결정하였다. 결코 좋은 환경을 바란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근로체계를 바랐을 뿐인데 말이다.
결론적으로 스타트업이 좋은 인재를 바랄 때 가장 먼저 지켜져야 할 다섯 가지를 정리해보면
1. 본인들의 열정을 직원들에게 강요하지 말 것
2. 좋은 인재를 바란다면 그만큼 좋은 환경부터 만들 것
3. 인재를 채용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직원 채용을 미룰 것
4. 가장 기본적인 복지체계를 지킬 것
5. 직원은 직원으로서만 바라보고 임금 문제로 얼굴 붉히지 말 것
만약 이 조차 지키지 어렵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직원을 채용하지 말고 혼자(동업자와) 일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