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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Feb 10. 2020

대상포진의 대상

2020년, 들어보기만 했던 대상포진의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살면서 나만큼 안 아픈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엄살도 없고 그냥 잘 안 아프고 살았다. 아파서 학교를 못 간 적이 없고, 생리통 같은 것도 잘 모르겠어서 그런 이유로 보건휴가를 써보지도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한다면 나는 청춘이 아니었고 아픈 것에 대해서는 무식자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 건강이 매우 당연한 나날들이었다.


평생 감기에 걸린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감기몸살로 앓아누워본 적은 더더군다나 없다. 단지 목소리가 쉬거나 콧물이 났던 경험이 전부였다. 독감주사를 맞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 건강을 맹신하는 것만큼 무식한 일이 없다고 했는데, 감기에 걸리지 않을 자신 같은 것이 은연중에 있었다. 주위에 비타민이나 영양제를 챙겨 먹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나다. 보약도 해당, 건강 관련 식품은 거의 먹지 않는다. 그게 자랑은 아닌데, 비타민과 영양제의 어떤 정확한 효과를 봤다는 친구들을 아직 만나지 못했고 그냥 좋다니까 먹고 있다,라는 식의 후기들이 아직 나에게 와 닿지 않았다고 해두자.

 

충치의 아픔도 몰랐고, 여전히 모른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친구들이 저마다 입안 깊숙한 곳에 금니와 은니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언제 그렇게 치과를 다니고 있었지? 나만 빼고 다들 치과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치과를 다녀본 적이 없다. 나는 치아마저도 건강했다.


산을 오르거나, 무리한 야외활동 후에도 힘들지 않았다. 일행에게는 항상 양해를 구했다. 나는 별로 힘이 안 드는 편이니까 네가 힘들거나 무리다 싶으면 신호를 보내달라고. 체력이 조금 달리는 친구와 유럽여행을 갔을 때, 종일 걷고도 더 걷고 싶었던 기분이었다. 뭔가 격앙이 되어서 야경을 보러 나가고 싶었다. 그때 친구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얼굴이 잿빛이 되어서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친구를 보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의 체력은 평균 이상이라고 주위의 친구들이 늘 얘기해줬다.


자타공인 체력 왕인 내가 통과한 체력측정의 최종 관문은 아마도 육아였던 것 같다. 육아는 물론 힘들었지만, 체력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피로였다. 불만이나 억울함 같은 것이었지 그게 절대적으로 몸의 피로였다고는 볼 수 없다, 나의 경우에는. 두 돌이 채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유럽여행에 다녀올 때의 나는 거침이 없었다. 마냥 즐거웠다. 당연히 그 이후에도 장거리 여행을 서슴지 않았다. 주말이면 말그대로 동해로 번쩍 남해로 번쩍 집에 붙어있지를 않았다. 친구들이 너 참 대단하다, 아기 데리고 여행 다니면 힘들지 않아?라고 조금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친구들에 비해서는 월등히 체력이 좋은 것이 보다 확실해졌다.


다만 나는 밥을 잘 먹는다. 많이 먹고, 가리는 음식이 별로 없다. 건강식품을 별도로 챙기지는 않지만 골고루 잘 먹는다. 많이 먹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나보다 많이 먹는 사람이 흔치 않다. 소식이 건강에 좋다던데 그렇다면 건강에 위배된 라이프스타일인거 같기도 하지만, 잘 먹은 것 말고는 이 건강의 베이스를 찾을 길이 없다.



그렇게 건강하나 믿고 살아온 나는 이제 마흔 살이 되었다. 하, 사용할 때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글자. 글자조차도 낯설기만 한 마흔. 낯선 마흔을 살기 시작한 지 불과 두 달이다. 열흘 전인가, 갑자기 어디라고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운 부분에 통증이 느껴졌다. 겨드랑이 근처인데 겨드랑이보다는 더 안쪽이고, 오른쪽 날개뼈 아래가 결리는 것 같은데 정확히 거기는 아니고 그렇다고 가슴이라고 하기엔 가슴보다는 한참 위쪽 그 어딘가의 통증. 이런 아픔은 처음이고 자주 아파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병원을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정형외과를 찾아가 봤다. 이런 통증으로 정형회과에 오는 게 맞냐고 하니까 우선 엑스레이를 찍어보라고 했다. 엑스레이를 찍은 후 의사 선생님의 소견은 "일자목이시네요. 물리치료받고 가세요"


물리치료실에서 40분 정도 치료를 받고났더니 통증이 느껴지던 부위에 피부 트러블이 생겨있었다. 손바닥 정도 되는 생각보다 널찍한 피부 트러블을 문제로 인식한 경위는 여름에 수영복 입었을 때를 상상하면서였다. 사실 여름에 수영복 입을 일이 많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의문일 수 있지만, 올여름에 래시가드가 아니라 수영복을 입고 싶었고 발리에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이번에는 다시 피부과를 찾아가게 됐다. 한참을 대기한 후에 진료실에서 만난 선생님에게 간단히 증상에 대한 브리핑을 한 후 등짝을 보여드렸더니 보자마자 "대상포진인데요? 안 아팠어요?" 아 아프긴 아팠는데.


두둥. 대상포진.


들어본 적은 있는데 그게 뭔지는 자세한 정보가 없는 그런 류의 병이었다. 확실한 건 굉장히 아픈 거라고 했고, 대체로는 그게 뭔지 알고 있는 분위기 었으며 두세명 건너 한 명꼴로 "나도 대상포진이었다"라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진짜 엄청 아프지 않더냐는 말에 어느 정도 아픈걸 많이 아프다고 해야 되는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매우 대중적인 대상포진을 나만 모르고 살았나 보다.



지난 주말 처방받은 약을 먹고, 다소 유연한 편인 나는 등에도 손이 닿지만 굳이 남편에게 약을 발라달라고 요청해봤다. 아픈 척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살도 피워본 사람이 피운다고 나같이 엄살 같은 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나 지금 대상포진이다,라고 해놓고 욕실에 구연산을 뿌려놨는데 남편이 가서 청소를 하기까지 못 참고 일어나서 화장실 청소를 한다거나 둘째가 엄마 엄마하고 찾으면 무턱대고 무의식 중에 아이를 업고 놀아주다가. 아니지, 정신 차려 나 대상포진이야. 가만히 누워있자. 나는 지금 아프니까. 그렇게 나의 대상포진을 즐겨(?) 봤지만 즐겁지 않았다. 굉장히 진부하지만 역시 건강이 제일인 것만 되새기는 계기였다.



오랜 건강 외길의 끝에 마흔, 대상포진의 대상자가 되어있다.

역시 마흔 별로야. 마흔 되자마자 면역체계가 붕괴된 건가. 한방에 훅간다는 것이 이런 걸 두고 한 말이었네, 속으로 궁싯궁싯 하며 의미를 많이도 둔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건강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나 같은 건강 불감증 인간을 대상포진 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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