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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Jun 18. 2020

굿바이,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의 첫 번째 손녀다







    어릴 때는 시골 할아버지께 종종 편지를 보내곤 했다. 문방구에서 사 온 편지지에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이며 시골의 외양간 송아지들 안부 같은 것을 묻곤 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라는 문장을 꼭 마지막 줄에 적어 넣었다. 반으로 두 번 접은 편지지를 봉투에 넣어 봉하고 혓바닥을 '에'가 아니라 '애' 하고 내밀어서 우표 뒷면의 풀을 침으로 살려냈다. 우표를 붙인 편지를 들고 동네 어귀 빨간 우체통으로 갔다. 동네에 커다란 갈색 우체국 가방을 멘 우체부 아저씨가 하루에 한 번 돌아다니시며 우편물을 수거하셨고 편지를 보내 두고 잊을 때쯤 되면 할아버지로부터 온 답장이 다시 우체부 아저씨 손을 통해서 우리 집으로 전해졌다.


    봉투에 적힌 글자만 봐도, 아 할아버지! 하고 알아챘다. 한자가 섞인 멋진 필체의 그림 같은 편지 내용을 읽는 것은 암호를 푸는 작업 같기도 했다. 파피루스 위에 적힌 고대 성형 문자를 해독하는 고고학자처럼, 차근차근 할아버지의 소식을 번역해나갔다. 그때 할아버지께 받았던 편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손편지들을 좀 모아둘 것을. 우리 집에서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보는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었다. 아빠.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큰아들 말이다.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를 하고 있는 큰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할아버지는 낭만적이고 멋있어 보였다. 그 편지에도 한자와 한글이 그림처럼 흘러 다니고 있어서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편지를 참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시골집에는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갔다. 두 번은 추석과 설날이었고, 두 번은 방학 때였다. 할아버지 집은 말 그대로 정말 시골에 위치했다. 영화 집으로 에 나오는 집과 비슷한 분위기였고, 그 집보다는 규모가 컸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대추나무가 훤칠한 마당에는 닭과 소가 살고 있었다. 툇마루 아래는 강아지가 늘어져 낮잠을 잤고, 슈퍼에 나가려면은 걸어서는 삼십 분 이상을 나가봐야 했다. 하루 종일 바빠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달리, 서울에서 온 손녀는 할 일이 없어 심심했다. 뭣 좀 도와드릴까요, 아궁이에 불을 때고 싶어서 옆에 쪼그려 앉으면 가서 공부나 하라면서 손을 저으셨다. 할아버지의 경운기를 타고 덜덜 덜덜 읍내에 나가거나, 그냥 외양간을 어슬렁이다가 이미 밥을 먹고 늘어져있는 소에게 다시 여물을 나눠주면서 나른하게 흐르던 시골 할아버지 집에서의 시간들.


    우리 아빠가 6남매 중에 첫째이고, 나는 그 첫째 아들의 첫째 딸이다. 그러다 보니 첫 손녀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첫째라는 어드밴티지는 실제로 대단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아낌없이 독차지했다. 생각해보면 그때 할아버지는 참 젊고 핸섬하셨는데, 할아버지의 흰머리를 뽑아드리면 하나에 100원씩 주신다고 해서 내 무릎을 베고 누우신 할아버지 머리카락 사이를 헤쳐서 신중하게 흰머리를 뽑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농사꾼으로 살아가며 성실하게 그을린 피부 위로는 주름이 별로 없었다.


    그 뒤로 줄줄이 사촌동생들이 태어났다. 가족들이 점점 커져갔다. 할아버지의 6명의 자녀가 모두 출가해서 12명이 되었고, 그들이 모두 두 명씩 자식을 낳았으며, 그 자식들 중 가장 막내가 작년에 대학을 가면서 모두 성인이 되어있다. 나를 포함해서 3명은 또 결혼을 했고, 저마다 두 명씩 아이를 낳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곳에 초가집을 지을 때 두 사람에서 비롯되어 지금은 이렇게 커다란 가족이 되어있다.


    대학생 때쯤부터는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싫어서 투덜거렸다. 다른 애들처럼 나도 텅 빈 서울에서 한가하게 친구들이나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매번 보는 친척들인데 한번 안 본다고 큰일이 나느냐 철없는 소리를 했다. 그 무렵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서 한두 번 시골에 가지 않았다. 명절날 아침 전화 너머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서운함이 전해져 왔다. 다음에 꼭 찾아뵐게요, 무성의하게 대답하던 그 시절 나.


    결혼 이후 명절이 돌아오면 아이러니하게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어 졌다. 시댁은 서울인데 나의 할아버지 집에 가기 위해서 지방으로 내려갈 때 남편의 눈치가 보였다. 그래도 명절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에 갔다.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나의 시골에 가는 것이다. 나의 어릴 적 추억이 아이들과 오버랩되는 것이 좋았다. 이제 다 성인이 되어버린 푸석한 우리들이 아니라 나의 아가들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웃으면, 그런 아이들을 보며 해맑게 웃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난겨울 할아버지의 건강이 또 안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설을 앞두고 있어서, 설날에는 꼭 찾아뵈야지 했는데 코로나가 닥쳐왔고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지 않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3월쯤, 할아버지가 서울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로 입원을 하셨다. 며칠 입원 후에는 요양원으로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삼사 년쯤 됐다. 연로하셔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시는 거라고 했다. 여섯 명이나 되는 고모들과 작은 아빠들이 워낙 살뜰하게 챙기시다 보니 나한테까지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주섬주섬 핑계를 찾아본다. 가끔씩 할아버지가 떠올랐지만, 나는 생각만큼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코로나 때문에 요양원의 면회 제한이 강화되어서 가족들도 면회를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 퇴근 후에 동생 내외와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병실에서 할아버지가 침대 한편에 누워계셨다. 어두운 와중에도 우리를 알아보시고는 손을 꼭 잡으시고 소리 내어 웃으셨다. 아이고 너희들 왔구나, 할아버지가 반색하시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셨다. 누워계셔도 돼요. 하니까 자꾸 할아버지 옆에 앉으라고 우리를 잡아당기신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는데 간호사가 면회 종료를 알려왔다. 할아버지 꼭 다시 올게요. 할아버지 맛있는 거도 잡수시고 기운 내세요. 꼭 다시 찾아뵐게요.


    지난주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있던 가족들이 모두 부랴부랴 시골로 내려가게 됐다. 가는데 3시간이 걸린다고 나왔는데 가는 도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직 한 시간을 더 가야 하는데, 병원이 아니라 장례식장으로 목적지가 바뀌었다.


    갑자기 고아가 된 여섯 명의 남매가 목놓아 울고 있다. 부모 잃은 순간은 아이고 어른이고 없이 모두 우는 표정이 똑같다. 날마다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르더니, 이제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어디로 가는 거요, 엉엉 우는 할머니를 부축하고서 우리들 모두 울고 있었다. 비가 쏟아졌다. 아, 지금부터는 할아버지가 없는 세상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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