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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웨인 Jan 25. 2018

내 이름을 부른다

아침이 아직 오지 않은 걸까


내 이름을 누군가 그렇게 불렀다.


오른쪽 어깨가 들썩거린다. 걷는데 묘하게 병신 같다. 사거리를 지나는 버스 번호가 점점 커져 보인다. 무시하고 건넜다. 버스 창에서 욕이 튀어나온다. 자정이 넘은 시간, 운전하는 아저씨가 식겁했나 보다. "야! 개새끼야! 뒤지려면 너나 뒤져!" 스쳤나 봐. 살점이 흩어지면 민폐일 텐데.


버스 꽁무니가 스쳐 지나간다. 쌍욕이 점점 멀어져 흩어진다. 건너편 인도에 발을 디뎠다. 누군가 불러 돌아봤다. 아무도 없다. "슥기야." 또 한 번. 그래, 내 이름을 누군가 그렇게 불렀다.


아침이 오지 않는 시간이었다.

해마다 새해를 기다려 12시가 넘으면 통화하던 친구가 있었다. 스무 살이 되던 그해 목숨을 끊었다. 슬픈데 멍했다. 밤길이 무섭지만 태연한 척 다녔다. 둘 다 아팠을 게다. 하지만 어디가 아픈지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하나가 내가 살던 동네로 와 하숙을 했다. 멀지 않은 곳에 멀쩡한 자기 집이 있는 놈이었다. 밤마다 그와 한남동과 이태원을 누볐다. 아침이 오지 않는 시간이었다.


친구는 사귀던 동갑내기 아이가 있었다. 경남 진주에 살았는데 서울에 가끔 왔다. 애교가 많던 여자였다.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할 때면 둘 다 깜빡 넘어가곤 했다. 한 이불에 셋이 잘 때면 가끔 두근거렸다. 얼굴은 잊어도 떨림은 남았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서울에 왔다. 오늘은 내 자취방에서, 내일은 친구의 하숙집에서 함께 보냈다. 내일과 모레가 없어도 괜찮았다. 그 아이 아버지는 진주 중앙시장에서 금은방을 하셨다. 재수생이던 친구와 사귀던 딸이 못마땅하던 아빠는 결국 딸의 외출을 금지했다.


순간, 내 이름이 들렸다. 아침이 아직 오지 않은 걸까.


그해 겨울. 친구와 같이 진주에 갔다. 살얼음으로 덮인 촉석루를 걸었다. 유일한 진주의 기억이다. 그 아이의 집은 봉곡동이라는 동네에 있었다. 푸른 대문을 낀 높은 벽돌담이 보였다. 어스름한 어둠 속, 깨진 병 조각이 반짝인다. 그 위로 무언가 떠다녔다.


친구 대신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빠 몰래 그 애를 나오게 하려면 내 이름을 불러야 했다. 서울말이 아닌, 경상도 사투리로 불러야 했다. 어설픈 사투리다. 중국어 성조처럼 리듬을 탄다. '스~윽기야~' 이름을 수십 번 부른다. 소리에 쌓인 내 이름이 담 위로 뜬다.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묘하게 서늘한 밤이었다.


내 이름을 들은 그 애가 몰래 대문을 나왔다. 셋이 진주 밤거리를 돌아다닌 것은 중요치 않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디를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날의 서늘했던 온도만 선명하다. 주머니에 연신 손을 넣었다 빼며 계속 뒤를 돌아봤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 소리 위에 눈이 쌓였다. 나를 기다리는 울음같이 들린다.


이름으로 불린 기억이 드물다. 팀장, 이사, 누구 아빠가 이름을 대신했다. 7블록 도로를 건널 때 유혹에 빠졌다. 부딪혀 죽었으면, 잠시 생각했다. 늦은 시간, 달리는 버스, 절룩거리는 걸음. 타이밍은 맞았다. 스쳐 가는 버스, 개새끼라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내 이름이 들렸다. 아침이 아직 오지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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