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의 다락
방의 귀퉁이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
벽 위의 작은 손잡이를 당기면 계단이 보인다. 동굴처럼 낮은 계단이다. 오르려면 기듯이 손과 발을 써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계단이다. 계단을 오르면 다락이다.
신기한 장난감이 가득 차 있고 하늘로 향한 작고 예쁜 창이 있어 별과 함께 하는 동화 같은 곳이 아니다. 백과사전이 놓인 앉은뱅이책상과 낡은 엄마의 여행가방 하나, 좁고 어두운 다락이다.
엄마와 나의 다락이다.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하던 아들의 공부방, 몰래 손목을 끌고 올라가던 훈육의 장소, 동생들이 올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취한 아빠가 엄마를 해코지할 때도, 가게에서 싸움이 나 공포를 느낄 때도, 보고 싶은 책에 설렐 때도 다락에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들의 종아리를 당신의 다리와 묶어 피투성이가 되도록 회초리를 후려치던 곳도 다락방이었다.
연필을 깎는 것은 다듬는 것이라고 하셨다.
공부도 숙제도 글짓기도, 싫은 내색 없이 스스로 하는 아들에게 엄마는 한 가지를 가르치셨다. 연필 깎는 법이었다. 연필을 깎는 것은 다듬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게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엄마의 말은 세상의 전부였다.
가르친 대로 연필을 깎았다. 공부하기 전, 숙제하기 전, 책을 읽기 전, 무서움에 숨을 때도 연필을 깎았다. 그것은 마치 무언가 깊이 몰입하기 직전의 전희 같았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버티게 하는 자정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작은 손으로 연필을 깎았다. 긴 연필이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깎았다. 볼펜 대에 끼어 더 깎을 수 없을 때까지 깎았다. 필통에는 작은 연필들이 가득했다.
서울로 전학을 온 그 해, 친구의 집에서 이상한 물건을 보았다. 자동으로 연필을 깎는 기계였다. 예쁘게 깎인 연필이 신기하기만 했다. 처음으로 어머니께 무언가를 사달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셨다.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다. 돈을 모아 직접 연필 깎기를 산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웅크린 채 연필을 깎는 나를 기억해냈다.
우연이었다. 부러진 연필이 눈에 띄었다. 연필을 깎고 또 깎았다. 네 번째 깎았을 때 다락방을 기억해냈다. 앉은뱅이책상을 기억했다. 그 옆에 웅크린 채 연필을 깎는 나를 기억해냈다. 백과사전도, 바래진 벽지도, 회초리도 떠올랐다. 아버지의 고함도, 두 동생의 울음도, 어머니의 눈빛도 기억해냈다.
나만의 의식이 존재했음을 떠올렸다. 부러지고 무뎌지고 초라한 것을, 부드럽고 날 서게 깎는 것은 연필이 아니었다. 버텨야만 하는 현실을 견디는 마음이었다. 연필 깎기를 사달라는 아들에게 아무 말씀이 없던 엄마는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일까?
아무도 없는 17층 아파트에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창피하지 않았다. 지금에야 기억해낸 것이 억울했다. 힘들어도 힘든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느끼는 순간 버거움에 사로잡힌다. 주저앉아 일어나기 어렵다. 바로 그 순간이다.
보이지 않을 만큼 연필을 깎고 싶다. 깎고 또 깎고 싶다. 깎아야 할 연필이 더 보이지 않는다. 잡으려는 순간 잃을지 모른다. 오래 숨겨둔 소중한 것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