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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뜽삼이 Jul 11. 2023

어떻게 싸울까?

23.07.11.화요일

늘 비슷한 문제로 괴로워하는 것 같다. 다행인 것은 괴로움이 10분 이내 끝났다는 것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비 온 뒤 상쾌한 풀내음을 맡고 싶어 아내에게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하였다. 가볍게 몸만 나갈까 하다가 베란다에 수북히 쌓인 쓰레기들이 눈에 밟혔다. 그렇다, 오늘은 분리수거하는 날이다.

그러나 더욱 내 눈에 밟힌 것은 바로 베란다에 맨발로 나간 아내였다. 아내는 베란다 슬리퍼가 있음에도 그것을 신지 않고 당당하게 쓰레기를 가지러 베란다로 나간 것이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안에서 짜증이 일어난다. 다만 이번에는 그 짜증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대체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무엇인가. 요즘 읽고 있는 「위빠싸나」에서는 '왜','어떻게' 등 근본을 따지는 사람들은 선정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한다. 표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선정에 들어가다? 선정에 이르다? 모르겠다.) 아무튼 그 말을 듣고 나는 나름 일리가 있다고 보았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문제삼고 따지기를 좋아한다. 이 감정이 어디에서 왔을지, 그리고 이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지, 상대방의 행동이 문제인지, 그리고 왜 우리가 여러 차례 이야기를 주고받았음에도 이것이 나아지지를 않는지 등. 계속해서 파고들려고 한다.

지금까지 금쪽이를 수십 편 본 나의 경험에 따르면, 이것은 아마 '불안도'가 높아서이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나의 내면이 너무도 연약한 것이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에 관해 꼬치꼬치 캐물어서라도 불안을 해소하려고 한다. 사티어에 따르면 '일치적'인 사람은 어떠한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르게 해석하면, 미성숙한(혹은 불안정한) 사람은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그 의도를 매우 궁금하게 여긴다.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받아들이기 어려워 하는 외부 사건에 대해 그 근원을 캐내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그것을 아는 것이 나의 불안을 낮춰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지금까지 경험해온 바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아내가 도대체 '왜' 베란다에 맨발로 나가는 것인지를 아는 것은 아내를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아내가 맨발로 베란다에 나가는 데에는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에는 나름의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매우 많은 행동들이 특별한 의도 없이,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곤 한다. 아마도 에너지를 절약하려는 뇌의 전략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절약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것을 알아내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대목은 최근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동기강화상담이었나? 다시 한번 봐야겠다.)

아무튼 나는 아내에게 이것이 정말 고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다가갔다. 우리가 이런 반복적인 패턴으로 갈등의 늪에 빠지곤 하는데, 그 때마다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비단 베란다 문제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타날 텐데...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을 돌아보면, 대부분의 경우 까다로운 규칙을 요구하는 것은 나였고 반대로 아내는 대다수 상황에 대해 허용적이었다. 그래서 그 동안 해결되었던 문제들을 보면 내가 더 이상 까다로운 규칙을 요구하지 않게 되거나 혹은 아내가 내가 기대하는 수준에 맞춰 행동해줄 때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생각이 다르다며 즉각 반론에 나섰다.

어느 한쪽에 맞추기보다는, 둘이 조금씩 양보하며 가운데에 수렴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난 그간의 변화 역시 그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례를 들려주었다.

아내는 현재 특수교육지원청에서 근무하고 있다. 대략 10여명의 동료 교사들과 함께 일하는데, 누군가 행주를 사용한 뒤 제대로 널어놓지 않는다거나, 싱크대 안에 축축하게 놓인 수세미를 볼 때 뭔가 문제의식을 강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점점 나에게 동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 역시 한때 세탁물을 색깔별로 분류하여 세탁기를 돌리는 사람이었는데, 그 기준을 점점 완화한 결과 현재 모든 세탁물을 한꺼번에 넣고 세탁기를 돌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는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그 모든 변화의 과정이 조금은 더 순조로워지길 바랐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돌이켜보니 알겠는데, 그 과정이 평탄하길 바랐던 것이다. 

내가 느끼는 이러한 바람은 비단 우리 부부 두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언젠가 맞이하게될 우리의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오늘 막 완독을 마친 『픽사 스토리텔러』 책의 저자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무엇이든 시도하고 실패할 수 있도록 격려해준 아버지가 있어 지금의 자신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 역시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가정 환경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 둘 사이에서 그런 환경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부터 변화하지 않고서야 아이에게 그런 가정을 선물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여전히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얘기가 딴길로 새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내 이야기를 아내가 귀기울여 들어주고, 나 역시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었기에 모든 대화가 평온하게 마무리되었다는 느낌만은 확실히 남아있다.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지만 뭔가 해결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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