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가 흔히 그랬듯 그날도 정전이 되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기는 엄마에게 과자 하나를 건넸다. 아니, 엄마가 과자라고 생각하고 받아 든 것은 곪아서 빠져버린 아기의 오른쪽 엄지발톱이었다.
엄마가 전해준 그 장면이 기억엔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내 생애 최초의 모습이다.
장손에게 시집와 딸 둘을 내리 낳은 엄마는 기어이 아들을 낳았다. 아들 낳고 당당히 친정 나들이를 갔을 때, 두 돌도 채 안된 둘째 아기는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할머니에게는 엄마가 시집와 같이 키우는 늦둥이 삼촌이 있었다. 당연히 둘째 손녀가 차지할 할머니품은 작았다.
엄마 등에 업히면 “보케 가자”(부엌에 가자) 하고 할머니 등에 업히면 “어야 가자”(마실 가자) 했다는데 아버지 혼자의 밥벌이에 3대가 함께 살았던 대가족의 살림살이로 엄마가 겪었을 노동의 몫이 짐작이 된다. 그랬던 엄마에게 아들 출산으로 주어진 친정나들이는 특별한 상이 됐을 것이고 그 상은 채 두 돌도 안 된 아기에게는 꽤나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저 무심하게, 내 의식 저 너머에 있었던 일이 어느 날 훅! 하고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여린 발톱에 염증이 생기고 곪아서 빠질 때까지의 시간들 속에는 엄마의 부재가 주는 막막함이 있었을 것이다. 아기였던 내가 느꼈을 그때의 감정들에 들어가 본다.
발가락을 내놓는 샌들을 신는 여름이면 앞 트임 샌들을 망설이게 하는 시작이 됐던 그날 그 장면이 어느 날 재생산되어 생생하게 살아난 것은 몇 달 후 큰 손주와 18개월 차이 나는 작은 손주를 보게 되면서이다.
동생을 보는 것이 조강지처가 남편의 첩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동생 본 스트레스로 원형탈모에 소아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는 친구 손자 이야기를 들으니 평범히 웃고 넘어갈 처지가 못 됐다.
“이렇게 터울 조절을 안 하면 큰 아이 스트레스는 어떻게 할 거냐”라고 의사에게 꾸지람까지 들었다는 한 산모의 이야기는 곧 큰 손주의 현실이 될 몇 개월 후의 시간을 생각해보게 하였다.
“작은 아이 낳기 전에 어린이집에 보내서 엄마와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 돼요. 일주일에 하루는 큰 아이가 온전히 엄마를 차지하도록 엄마와 단 둘이 있게 해야 돼요” 큰 아이의 스트레스를 줄여 줄 방안들이 조언으로 들어왔다. 점점 불러오는 딸의 배를 바라보며 어쩌면 남편과 나의 진정한 육아는 둘째 손주를 낳고부터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카엘의 고사리 손을 가만히 만져본다. 이젠 이 손으로 제법 과자도 집어서 먹을 줄 안다. 미카엘은 4개월 후면 ‘형’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 이름의 무게로 외롭지 않도록 미카엘의 시간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싶다. 내가 먹었던 그 시절의 과자가 나에게 치유의 온기가 되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