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공리셋 Aug 14. 2022

시삼촌이 돌아가셨다

삼일장을 지킨 애틋함

3일 내내 밤을 새 가며 상주 72시간을 함께 한건 아니다.

나는 시삼촌을 일 년에 네 번 뵈었다.

제사 두 번, 명절 두 번.

어쩌면 다른 친척들에 비하면 아주 자주 본 사이인 걸로 결론지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고서야 또는 애틋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요즘 세상에 굳이 3일 내내 자리를 지킬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편보다 더 많은 시간 자리를 지켰다.

'나와 추억이 더 많을 우리 큰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내가 3일장을 지킬까?'


일손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 진짜 일손은 방학중이라 집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았어야 할 엄마 역할이었는데 정작 아이들은 친정집에 맡겨놓고, 방문객도 없는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데 현타가 왔다.

상주들. 시고모님네 두 분. 남편의 큰어머니. 동서와 나. 그리고 시어머니.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앉아 있는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의 현실을 무시하고서라도 가서 자리를 지 할 시삼촌과 애틋한 사이였다고 말하지 않으면, 지난 과거 10년 동안 당연시되어온 가족문화가 반복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이 모든 상황은 시부모님의 뜻에 따르게 되어있다.

시아버님은 아이들 케어해야 하니 남편과 저녁에 오라고 하셨는데 시어머님 점심 먹고 며느리 둘은 라는 연락을 받고... 방학이라 낮시간에 집에 있는 아이들은... 알아서 하 데리고 오든...이라는 말을 듣고... 알아서 해결하고 갔다.


시아버님 눈치를  많이 보는 시어머님의 대소사에 있어 애매한 결정은 늘 우리를 힘들게 했다. 이번에도 왠지 그렇게 보였다. 시어머니 남편에게 또는 집안사람들에게 본인을 포함하여 자식 며느리까지 장례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었던 것 같다.

 분 의견이 다를 때면 시아버님 말씀을 따르는 게 잡음이 적다는 것을 10년 넘게 살면서 체득한 바인데, 이번에는 시어머님이 목소리를 크게 내셨다. 아바님이 동생을 잃고 임종을 함께하지 못한 쇼크로 링거을 꽂고 계신 상황이었기에 더 그러셨던 건지도 모르겠다.


시아버님 름휴가차 제주에 계셨고 동생이 입원 중 급격하게 몸상태가 나빠졌다는 소식에 남편과 도련님 대신해서 임종을 지키도록  주셨다. 결국 남편과 도련님 시아버님을 대신해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두 며느리도 돌아가신 당일날 시숙모님 얼굴을 고 오라는 시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아이들 학원보내고 급하게 다녀왔다. 이때는 나 또한 그간 시숙모님이 고생하신 걸 알기에 마음이 좋지 않아 얼른 채비하고 다녀오고 싶었.

둘째 날 시부모님도 장례식장으로 처음 오시는 날 버님의 연락을 남편이 받았다. 어제 너네들 뵙고 왔으니 오늘은 녁에 남편들 퇴근하면 함께 방문하라고. 그런데... 시어머님 점심 먹고 오후 녘에 며느리 둘만 저 오라고 하셨다. 굳이 왜... 무리해서 왜... 애들은 어떡하고 왜 낮에 먼저 가야 하냐 여쭈었더니 언제나 마땅한 타당한 이유는 없다. 소통의 유연하지 못함이라고 결론 내렸다.

나의 미친 열정과 몸 쓸 의무감은 또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타인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시어머니께서 우리가 갈 수 없는 상황이고 방문객이 많이 없을 테니 너네가 일 짝 와서 자리를 지켜주면 좋겠다고... 내가! 나를 설득했던 그 말로 전달해 주셨더라면 어땠을까?

 "당연히 너네가 가서 도와야 되는 거ㅡ 알지?!"비록 동서에게 전해 들은 말투였지만 이랬다는 후문에 더 거부감이 들었다.


코로나 때문 아이들 맡길 곳을 고민하다 늘 그랬듯 가까이 계시는 친정엄마께 전화를 걸었고 어차피 조문해야 할 자리이니 여행가 계셨지만 일찍 올라갈 테니 아이들을 맡기고 시어머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다. 집안의 큰 일일수록 어른들 말씀에 그냥 따르라는 친정부모님의 변치 않는 조언. 떻게든 지금 야만 하는 상황을 나 하여금 설득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둘째 날 2시쯤 동서와 례식장에 도착하니 시부모님은 여행지에시자마자 전에 다녀 가신 후였다. 어머님 도착해서 통화하니 옷 갈아입고 오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 두 며느리는 덩그러니 상주들과 일부 친척들과 손님 없는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다.

시어머니는 두어 시간 있다 나타나셨고 몸이 피곤하신지 상주들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두 며느리와 시고모님 일부 친척들 사이에 앉아 빈 테이블을 지고 앉아 있는데... 무념무상... 저녁이 되니 많은 사람들과 그들 사이 남편들도 퇴근하고 오고 친정부모님도 조문을 오셨다.

그렇게 지루함은 사라지고 내 가족들을 만나니 반가워 앉아 있다 9시쯤 자리를 떴다.


셋째 발인날, 시골뙤얕볕 장지를 향했다.

지에서 고인을 보내드리는 슬픈 의식을 행하는 동안은 잡생각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을 다하고 나니 다시 오롯이 나로 돌아올 수 있었기에 오히려 덜 힘이 들었다.

이 물같이 흐르는데 평한 햇빛에 했던 의 모습은 어디 가고 정신력으로 버틴 건지 하루 일과를 무사히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후로 자꾸 몸도 마음도 회복이 되지 않 너무 힘이 들었다. 현실은 방학중인 아이들과 정신없는데 내 몸은 자꾸 침대와 한 몸을 요구했다. 

'집안에 큰 일 잘 치렀으니 되었지' 생각 코 모두 잊고 싶었는데 찝찝한 감정 때문인지 자꾸 힘이 들었다.


납득이 되지 않 상황들...

목소리 내지 못 자식 며느리...라는 신분...

반복...


오래전 쌓여 있던 부정적인 감정 깊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내 몸은 이전처럼 시어머님이 오더 하는 데로 그냥 받아들이고 움직였던 건데 아픈 곳을 건드린 건지 빨리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내가 참 가엾기도 했다. 

로는 예민하고 생각이 많아 쉽게 털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워지기도 했다.


소리 내 울고 나면 마음이 좀 편안해다는 걸 깨달은 후 종종 마음 털 때 이불 덮었으도 고함치고 울 때가 있.

우연히였는데 속에 응어리가 내려가는 느낌 경험한 후 소중한 나의 의식행위가 되었다.

고생스러웠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끊이지 않는 내 마음의 갈등털어버리기 위해 소리 내어 펑펑 울어버렸다.


감정일기 외 나만의 이런 의미 있는 의식행들은 내 마음을 돌보기 위해 꼭 필요 삶의  되어가고 다.




작가의 이전글 네 가족이 보내는 연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