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내내 밤을 새 가며 상주와 72시간을 함께 한건 아니다.
나는 시삼촌을 일 년에 네 번 뵈었다.
제사 두 번, 명절 두 번.
어쩌면 다른 친척들에 비하면 아주 자주 본 사이인 걸로 결론지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고서야 또는 애틋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요즘 세상에 굳이 3일 내내 자리를 지킬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편보다 더 많은 시간 자리를 지켰다.
'나와 추억이 더 많을 우리 큰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내가 3일장을 지킬까?'
일손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진짜 일손은 방학중이라 집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았어야 할 엄마 역할이었는데 정작 아이들은 친정집에 맡겨놓고, 방문객도 없는 빈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데 현타가 왔다.
상주들. 시고모님네 두 분. 남편의 큰어머니. 동서와 나. 그리고 시어머니.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앉아 있는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의 현실을 무시하고서라도 가서 자리를 지켜야 할 시삼촌과 애틋한 사이였다고 말하지 않으면, 지난 과거 10년 동안 당연시되어온 가족문화가 반복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이 모든 상황은 시부모님의 뜻에 따르게 되어있다.
시아버님은 아이들 케어해야 하니 남편과 저녁에 오라고 하셨는데 시어머님은 점심 먹고 며느리 둘은 오라는 연락을 받고... 방학이라 낮시간에 집에 있는 아이들은... 알아서 하든 데리고 오든...이라는 말을 듣고... 알아서 해결하고 갔다.
시아버님의 눈치를 많이 보시는 시어머님의 대소사에 있어 애매한 결정은 늘 우리를 힘들게 했다. 이번에도 왠지 그렇게 보였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또는 집안사람들에게 본인을 포함하여 자식 며느리까지 장례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었던 것 같았다.
두 분 의견이 다를 때면 시아버님 말씀을 따르는 게 잡음이 적다는 것을 10년 넘게 살면서 체득한 바인데, 이번에는 시어머님이 목소리를 크게 내셨다. 시아바님이 동생을 잃고 임종을 함께하지 못한 쇼크로 링거을 꽂고 계신 상황이었기기에 더 그러셨던 건지도 모르겠다.
시아버님은 여름휴가차 제주에 계셨고 동생이 입원 중 급격하게 몸상태가 나빠졌다는 소식에 남편과 도련님이 대신해서 임종을 지키도록 연락을 주셨다. 결국 남편과 도련님이 시아버님을 대신해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두 며느리도 돌아가신 당일날 시숙모님 얼굴을 뵙고 오라는 시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급하게 다녀왔다. 이때는 나 또한 그간 시숙모님이 고생하신 걸 알기에 마음이 좋지 않아 얼른 채비하고 다녀오고 싶었다.
둘째 날 시부모님도 장례식장으로 처음 오시는 날 시아버님의 연락을 남편이 받았다. 어제 너네들 뵙고 왔으니 오늘은 저녁에 남편들 퇴근하면 함께 방문하라고. 그런데... 시어머님은 점심 먹고 오후 녘에 며느리 둘만 먼저 오라고 하셨다. 굳이 왜... 무리해서 왜... 애들은 어떡하고 왜 낮에 먼저 가야 하냐 여쭈었더니 언제나 마땅한 타당한 이유는 없다. 소통의 유연하지 못함이라고 결론 내렸다.
나의 미친 열정과 몸 쓸 의무감은 또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타인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시어머니께서 우리가 갈 수 없는 상황이고 방문객이 많이 없을 테니 너네가 일 짝 와서 자리를 지켜주면 좋겠다고... 내가! 나를 설득했던 그 말로 전달해 주셨더라면 어땠을까?
"당연히 너네가 가서 도와야 되는 거ㅡ 알지?!"비록 동서에게 전해 들은 말투였지만 이랬다는 후문에 더 거부감이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을 맡길 곳을 고민하다 늘 그랬듯 가까이 계시는 친정엄마께 전화를 걸었고 어차피 조문해야 할 자리이니 여행가 계셨지만 일찍 올라갈 테니 아이들을 맡기고 시어머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다. 집안의 큰 일일수록 어른들 말씀에 그냥 따르라는 친정부모님의 변치 않는 조언. 어떻게든 지금 가야만 하는 상황을 나로 하여금 설득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둘째 날 2시쯤 동서와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시부모님은 여행지에서 오시자마자 오전에 다녀 가신 후였다. 시어머님께 도착해서 통화하니 옷 갈아입고 오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 두 며느리는 덩그러니 상주들과 일부 친척들과 손님 없는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두어 시간 있다 나타나셨고 몸이 피곤하신지 상주들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두 며느리와 시고모님 일부 친척들 사이에 앉아 빈 테이블을 지키고 앉아 있는데... 무념무상... 저녁이 되니 많은 사람들과 그들 사이 남편들도 퇴근하고 오고 친정부모님도 조문을 오셨다.
그렇게 지루함은 사라지고 내 가족들을 만나니 반가워 앉아 있다 9시쯤 자리를 떴다.
셋째 발인날, 시골뙤얕볕 장지를 향했다.
장지에서 고인을 보내드리는 슬픈 의식을 행하는 동안은 잡생각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을 다하고 나니 다시 오롯이 나로 돌아올 수 있었기에 오히려 덜 힘이 들었다.
땀이 물같이 흐르는데 평소 강한 햇빛에 나약했던 나의 모습은 어디 가고 정신력으로 버틴 건지 하루 일과를 무사히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후로 자꾸 몸도 마음도 회복이 되지 않아 너무 힘이 들었다. 현실은 방학중인 아이들과 정신없는데 내 몸은 자꾸 침대와 한 몸을 요구했다.
'집안에 큰 일 잘 치렀으니 되었지' 생각 코 모두 잊고 싶었는데 찝찝한 감정 때문인지 자꾸 힘이 들었다.
납득이 되지 않던 상황들...
목소리 내지 못한 자식 며느리...라는 신분...
반복...
오래전 쌓여 있던 부정적인 감정이 저 깊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내 몸은 이전처럼 시어머님이 오더 하는 데로 그냥 받아들이고 움직였던 건데 아픈 곳을 건드린 건지 빨리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내가 참 가엾기도 했다.
때로는 예민하고 생각이 많아 쉽게 털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워지기도 했다.
소리 내어 울고 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는 걸 깨달은 후 종종 마음 털 때 이불 덮었으도 고함치고 울 때가 있다.
우연히였는데 속에 응어리가 내려가는 느낌을 경험한 후 소중한 나의 의식행위가 되었다.
고생스러웠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끊이지 않는 내 마음의 갈등을 털어버리기 위해 소리 내어 펑펑 울어버렸다.
감정일기 외 나만의 이런 의미 있는 의식행동들은 내 마음을 돌보기 위해 꼭 필요한 삶의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