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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공리셋 Feb 07. 2021

남편 생일 2탄

진심으로축하해

뭐.라.고?...


우리 부모님들이 그렇게 대놓고 요구하시지도 않았다.

당연히 생일밥을 함께하는 줄 알고 계신 게 잘못된 건 아니었다.

여태 그래 왔기 때문에.

여태 그래 왔던 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나 스스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나를 스스로 지켜주기로 마음먹은 이후로 시작된 내적 갈등이었기에 부모님은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 살면서 전화도 없이 2주 만에 방문했을 때 "오랜만이다"라는 식의 표현.

진짜 오랜만이라서 그럴 수 있겠지만, 표정이 이미 냉담하기에 이 예민한 감각의 며느리는 느낌으로 안다.

그러고 나면 또 미친 듯이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는 걸로 나름 계획을 세운다.

진짜 바빠서 못 갔을 수도 있겠지만, 전화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기준을 바꾼다.


요 며칠 머리가 너무 아팠다.

내면의 갈등을 겪기 시작한 이후로.

남편의 생일상을 차려야만 한다는 생각.

시어른들이 원하는 일.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


그 욕구를 채워드리기 위해 참고했을 일들에 대해 불필요한 상황이라는 생각으로 엄청난 자기 스스로의 갈등을 겪고 있는 듯했다.

코로나로 5인 이상 집합 금지 기간 서로 자숙하느라 명절도 피하는 마당에 서로 컨디션 좋을 때 얼마든지 만나서 밥을 먹을 수도 있기에, 복직 한 달 앞두고 내 마음이 분주해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하기 싫다'에 더 크게 다가왔다.


남편도 애매한 포지션에서 모르겠다고만 했다.

그래 본인이 애매한 포지션이면 내가 애매해지기에 10년 차 며느리가 직접 나서야 했다.

섭섭해하실지언정 독설 날릴 분들이 아니기에 나 스스로가 나에게 솔직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연습이 필요했기에.


따르릉~간단한 안부인사를 나눈 뒤,

"어머니~이번 주에 생일상이요, 제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요?"

"왜, 몸이 어디 안 좋나?"

"네... 그냥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요..."

"뭐, 신경 쓰는 일 있나?"

"복직 앞두고 이래저래 마음만 분주하네요..."

(차마 이런 내적 갈등으로 인한 두통이 있다고 솔직할 수는 없었다)

.

.

.

"그래, 그럼 너희끼리 해 먹으면 되지"


속으로는 어찌 생각하시든 그렇게 나는 나를 위해 용기 내었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지고 두통도 사그라들었다.

10년 동안 그냥 힘들어도 참고 해왔던 행위들에 용기를 내어서 거절이란 것을 해봤을 때 쾌감, 적절한 어휘를 모르겠다.

무서운 유교적 신념이 대물림 되지 않기를, 아들들도 깨지 못하는 것들을 하늘이 점지해주셨다는 큰며느리가 해냈구먼...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무슨 집안 큰 행사 같은 제사도 아니고, 마흔 줄 넘은 아들 생일인데 꼭 해야 할 이벤트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힘들게 얘기해야 하나 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1개의 집안 제사와 가족 구성원 열 명의 생일이 우리 집안에서는 아주 큰 이벤트이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 때는 결혼하고 아이들까지 꾸린 아들 둘이 엄마 빼빼로데이도 챙기고, 화이트데이도 챙겼다.

그러니 생일은 아주 큰 이벤트인 거다.

누가 봐도 각별한 가족애를 봐온 나로서는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스무 살 성인이 되고부터 타지에 독립해 있다가 서른 살에 결혼했기에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결혼생활은 혼자가 아니기에 내가 아닌 타인과 삶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에 유연성을 가지고 대처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 한 명이면 내가 선택한 남자이기에 노력으로도 가능했는데!

거의 시부모님이 함께이고 보니 혼란스럽고 짜증 나고 대체 내가 누구와 결혼한 건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뛰쳐나올 만큼의 배포는 없고, 남편을 들볶지만 착한 남편은 안 변하고 그렇게 나는 아마 더 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 계발에 미쳐갔던 것 같다.

목적도 없이 그냥 내가 없어지는 그 시간을 피해 내 것을 하고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싶었던 듯하다.

신혼생활 중에 대학원을 입학한 것도 그 맥락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나도 꼬마 7살 때 큰어머니 댁에 따라가 제사상 앞에서 큰 집 오빠들 두 명, 우리 오빠, 할아버지, 큰아버지, 우리 아빠, 그리고 나는 귀한 집안의 막내딸로 쪼로미 옆에서 절하려고 서 있으면 할아버지가 무섭게 "어어, 여자는 안된다, 수현이는 엄마 옆에 가 있어라"

이유도 모르고 울면서 쫓겨나고 엄마도 안된다고 달래기만 할 뿐 옆에 앉혀두시길래, 엄청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여자는 안된다! 할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만 듣고 여자와 남자 역할에 대해 나는 이미 어릴 때부터 세뇌되어 자라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10년 결혼생활 나름 평탄하게 잘 참으면서 나름 시부모님의 관심과 사랑도 받으면서 지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부모님도 며느리도 아들도 각자가 가정을 꾸려 나아감에 30년을 자라온 시간에 비해 10년은 터무니없이 짧고, 앞으로 건강한 가족관계를 위해서는 개인 각자가 다른 인격체로서의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에 맞게 유연성 있게 대처해가는 것.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코로나도, 내 컨디션도 상황이 그러하면 전화로 축하인사만 건네고 넘어가면 되는 거였다.


해야만 한다! 해야 한다! 10년 관습을 깨부수는 일.

내적 갈등이 시작될 때 이미 내 마음은 탐탁지 않은 거였다.

며느리의 역할 우선순위가 아닌 '나'를 위한 일이었다.

스스로 잘했다고 백번 칭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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