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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연 Jul 13. 2016

나만의 모임 기준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

나는 어떤 기준으로 모임을 선택하는가

어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어느 상황에서도 외향적인 그런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20대 때의 나는 낯도 많이 가렸고 새로운 모임에서 먼저 말 걸어주지 않으면 결코 입을 열지 않는(그럴려면 모임에는 왜 나감?) 사람이었다. 30이 넘어가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 좋아하는 모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걸 간과한 채 나간 모임에서 내가 좋은 느낌을 받았을 리 만무했다.


몇일 전 고민 상담 톡에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자기는 듣는 것도 좋아하고 굳이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듣고만 있는 건데 사람들이 화난 걸로 오해하기도 했다고. 많이 공감했다. 인상이 차갑거나, 도도하거나, 무뚝뚝하면(난 무뚝뚝에 가까운) 어떤 사람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포인트는 내 인상의 호감/비호감 여부가 아니라 이 모임을 기꺼이 내가 원해서 온 것이냐 여부이다. 본인이 원해서 참여한 모임 자체가 좋던,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좋던, 아니면 그 모임에서 나오는 주제가 관심이 있던 자기만의 모임 기준이 있다면 그런 자세로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 모임이 원해서 간 모임이었는지를 묻자, 어떻게 하다 참여한 모임이긴 했지만 본인이 원했던 모임은 아니었던 거라. 사람들이 가끔 하는 말 중에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라는 말이 있다. 나도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는 입장에 가깝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의 비중을 늘리며 살아갈 수는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야 더 행복에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기 위해 노력하는 거고.(참, 이동진 기자님의 빨간 책방에서 김중혁 작가님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이동진 기자님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요 말을 관계적인 측면으로 바꿔보자면 '어떻게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살아?'라는 말이 된다. 조직 사회에서는 힘들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내 상황에 내가 만나는 사람을 내가 참여하는 모임을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해진다. 외향적인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그들은 사교적이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반면에 다소 깊이는 없을 수 있다.(일반화는 아닙니다.) 게다 그 사교성은 그 사람이 나와 좀 맞지 않고 내가 싫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외의 관계적인 측면을 더 좋게 보기 때문에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기도 한다. 그런 기질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면 나와 맞는 나에게 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모임을 찾아나서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난 당연히 후자다. 짧은 인생,(혹은 길더라도)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싶다. 그 모임에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혹은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가지를 쳐 나가다보면 관계적인 측면에서 편안해지는 순간이 올 거라 생각한다. 20대 때를 떠올려보면 일부러 말을 걸고, 분위기를 맞추고, 외향적인 척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집에 가면서 '내가 왜 그랬지?'하는 생각과 동시에 많이 불편했던(이질감이라고 표현해보자.) 기억이 난다. 생긴대로 사는 게 편한 사람이 있고, 생긴 걸 극복하며 사는 사람이 있으며, 타인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다.


결국 나는 누군인가?로 시작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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