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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연 Oct 16. 2017

50가지 사소한 글쓰기(29) 유머(함께 웃기)

에피소드(1) 유먼 비잉(Humor + Human being)이 좋아.

에피소드(1) 유먼 비잉(Humor + Human being)이 좋아.


사람들은 유머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도 유머가 있는 사람이 좋다. 유머가 있는 사람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사람이나 마냥 히죽거리는 사람과는 다르다. 적어도 나에게 유머가 있는 사람은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와 비슷한 개그 코드를 가진 사람, 코메디 영화를 보면서 같은 지점에서 빵 터질 수 있는 사람, 내가 함께 웃고 싶어 공유한 일간 유머를 보며 깔깔댈 수 있는 사람, 심심한 일상을 유머로 한 단계 밝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유머의 유형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생각한 내 주위의 유먼 비잉을 생각해보니 내 동생이 단연 으뜸이더라. 엄마, 아빠, 언니, 나, 여동생, 남동생 6식구가 모이면 무뚝뚝함 속에서도 각자 자신의 개성이 발휘되는데 여동생은 누구한테 개그감을 받았는지 혼자 유독 개그 드립이 뛰어나다. 때로 가족들이 다 아는 누군가의 성대모사를 하기도 하는데 표정과 말투의 똑같음에서 볼 때마다 빵빵 터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웃음 지수는 올라간다. 


나는 개그감이 뛰어나기보다는 가-끔 튀어나오는 독특함으로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얼마 전에 함께 있는 사람들과 빵 터진 기억이 있다. 합정에서의 만남은 9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집이 분당이었기에 그 때 출발해도 집에 가면 11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설명하기를 집에 늦게 들어가면 무서운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그래서 집에 늦게 가기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2분이 무서운 아이?하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라고 물었고, 나는 '11시 넘어 들어갔을 때 다리 긴 아이를 만났었다'며 설명했다. 두 분은 '다리 긴? 아이?'라며 휘둥그레한 눈으로 쳐다봤고, 나는 다시 '네 그 다리 긴 곤충(사실 곤충도 아니다. ㅡㅡ) 있어요. 그리마(어떻게 생겼지?라는 궁금증에 제발 검색하지 마시라)라고...' 했을 때 두 분은 이미 배를 잡고 있었다. 순간 아 내가 무서워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구나를 깨달았고 나 또한 빵 터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아이는 오늘은 안 만날 수도 있으니 커피 한 잔 더 하고 가라며 부추겼고, 나도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좀 더 함께 웃고 싶은 마음에 그러자고 했다. 


아빠는 경상도 분이다. 지역마다 유머색이 다를 거라는 막연한 추측만 있는데 아빠 딸이라 그런지 나는 경상도의 까칠한 유머가 좋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운전 연습을 할 때 좁은 골목을 지나가려고 조심조심하면 '태평양만 한 데를 못 지나간다'며 구박하신다. 그런 까칠한 유머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아주 가끔 경상도 남자를 만나 그런 유머를 들을 때면 어느새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지만 셋의 유머 유형은 다 다르다. 동생은 개그맨같은 개그 감으로 사람들과 함께 웃는 것이며, 나는 예상치 못한 독특함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아빠의 유머는 츤데레 유머다. 말투와 내용은 다정하지 않지만 그 베이스에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깔린 유머라고나 할까. 어떤 행동에 대해 반어적 어법을 구사해 상대에 따라 그 까칠함으로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나는 츤데레 유머가 재밌다. 


에피소드(2) 웃기거나, 웃거나


관계를 좋게 만드는 기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게 하나를 꼽으라면 유머를 꼽겠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유머란 '함께 웃을 수 있는 기술'로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겁다고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운 사람은 또 만나고 싶을 확률이 높다. 함께 웃을 수 있는 기술은 또 다시 2가지로 나뉘는데 잘 웃기거나, 잘 웃거나이다. 내가 유머러스해서 사람들을 웃게 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잘 웃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관계를 좋게 만드는 강점이 될 수 있다. 잘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웃는 포인트에 함께 웃어주는 것이다. 잘 웃으려면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며 상대방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대부분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유머러스한 사람이기보다는 잘 웃는 사람에 가깝다. 내가 말하는 '잘'은 그 빈도수에 있기보다는 적절한 타이밍에 있다. 정말 웃기거나, 재미있어야 웃기 때문에 무표정(가만히 있으면 화난 거 아닌가 착각하게 만드는 표정)에 일가견이 있는 내가 웃으면 그 해맑음(반전은 예측불가능하기에 더 매력적)에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 게다 그 웃음의 표현도 크지 않다. 한 번 지인 4명과 함께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자리가 없어 나랑 성향이 비슷한 분이랑 내가 앞좌석에 앉고 나머지 3분이 뒷 좌석에 앉았다. 영화가 끝나고 그 여흥을 즐기는데 뒤에서는 온 몸을 들썩거리며 박수도 쳐 가면서 보는데 앞의 2명은 미동도 않고 보길래 재미가 없는 줄 알았다고 한다. 웬 걸 우리도 충분히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얼굴로만 표현했을 뿐이다.  


난 내가 자주 웃지 않기 때문에 너무 웃음을 남발하거나, 인상 자체가 웃는 인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웃음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허물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조심한다. 그 사람의 웃음이 진짜인지 판별이 되기 전까지 신뢰하지 않는다. 유머러스한 사람을 좋아하고, 함께 웃는 걸 좋아하는 사람치고는 꽤 야박한 태도일 수 있지만 이런 태도가 수반되어야 더 잘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웃음이 부족한 건 어쩌면 진짜 웃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어서는 아닐까. 인상이 좋은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닌, 그 좋은 인상이 진짜인지 판별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웃는 인상을 강요하기보다는 적절한 타이밍에 웃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웃어야 행복한 게 아니라, 함께 웃을 수 있을 때 행복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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