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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미 Apr 16. 2020

본의 아니게 패셔니스타

한 여름의 블라디보스토크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의 옷차림이.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선글라스는 얼핏 보기에도 같은 디자인이 하나도 없었다. '진짜 저런 옷을 일상복으로 입는단 말이야?' 싶을 정도로 패션은 과감했고 컬러는 그야말로 알록달록. 고작 2킬로 될까 말까 한 아르바트 거리 안에 세상의 모든 색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어떤 여성은 딱 달라붙는 흰색 원피스 아래로 핫핑크 속옷 세트가 가감없이 비쳤다. 그리고 같은 컬러의 핫핑크 하이힐까지! 세상에.


사람들은 최대한 화려하고 찬란한 옷차림으로 러시아의 이 짧디 짧은 여름을 만끽하는 듯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양공원


식당의 테라스 자리에서 정신없이 눈을 돌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엄마가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너 등!"


여행을 위해 장만한 원피스의 첫 개시 날이었다.


급한 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단단히 어긋난 지퍼는 가운데가 벌어진 상태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손을 뒤로 돌린 어려운 자세로 꼼짝도 안 하는 지퍼와 씨름하느라 삐질삐질 땀이 솟았다. 


'하. 어쩐지 너무 저렴하더라'  


화장실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엄마한테 태연하게 말했다. "안되네. 그냥 이러고 다니지 뭐. ㅎㅎ" 무슨 소리냐고 기겁하며 어떻게든 가려보려는 엄마와 달리 이미 포기한 나는 무념무상이었다. 겉옷과 속옷이 구분되지 않는 그 거리에서 이 정도 등 노출이 대수인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 패셔니스타들의 무리에 슬며시 발을 들여놓은 것 같아 오히려 들떴다. 살면서 입어본 옷 중에 가장 노출도가 큰 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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