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속도
인생의 평가는 마지막에 쓰인다.
나는 마라톤을 정말 싫어했었다.
TV에서 두 시간 가까이 중계를 해주면 내내 달리는 모습만 나오니, 지루하기도 하고 보고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채널을 돌리곤 했다.
인식이 바뀌게 된 이유는 은퇴한 마라톤 선수의 이야기를 듣게 된 이후다.
은퇴한 스포츠 스타들이 출연한 방송이었다.
대부분의 은퇴한 선수들은 현역 시절 기록이나 명성을 떠나, 현재는 그 운동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이 해 왔기 때문에, 이제 질렸다, 할 만큼 했다, 부상이 심해서 못 한다.
등 충분히 공감될만한 이유를 가진 이야기였다.
하고 있지 않음에도 멘탈이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
한 분야에 인생을 얼마나 쏟아부어야 미련 없이 마무리할 수 있는지, 감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은퇴한 마라톤 선수는 개인 루틴으로 아직도 매일 몇십 킬로씩 뛰며, 그 자체가 너무 좋다고 이야기했다.
슈퍼스타들 사이에서도 그 순간 가장 빛나는 스타로 보였다.
평생을 해오며 좋은 기록을 만들고, 은퇴를 한 지 10년이 넘었다.
아직도 그 일을 좋아하고 꾸준히 실행하고 있는 모습들에서, 마라톤이라는 종목과 선수가 하나가 된 듯 일맥상통함을 느꼈다.
‘인생 자체가 마라톤으로 변했구나’
정말 멋있는 종목과,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느꼈다.
장르와 하나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 꾸준함을 통해 그림을 살펴보자.
초반에는 누구나 빨리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크다.
기간을 오래 잡고 진행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경우도 많지만.
하나를 얻어 내면 바로 적용되고, 향상되며, 즉각적인 효과가 나오는 시스템을 원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내재된 속마음이다.
빨리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좋다.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더딘 성장 속도에, 처음 각오와 달리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시행착오를 굉장히 많이 겪어야 성장할 수 있다.
오히려 배워가며 너무 순조롭게 흘러가는 느낌을 받을 때, 체크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습득하여 저장되기 시작하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특정한 과정'과 바로 마주하게 된다.
대부분의 개인 저장공간은 새로운 정보와 방법들을 한 번에 수용할 만큼 크지 않다.
이 과정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정보들이 저장되지 않고 새어나가고 있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충돌구간에서 융합기로 가는 과정'이다.
그동안 가져온 자기만의 생각과 방식들이 존재한다.
새로운 것이 접목되려 하면 아무리 정보가 스무스하게 잘 들어가도, 작은 용량 안에서 기존 인식과 크고 작은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충돌을 잘 완화하고 융합기로 넘길 수 있다면, 기존에 지니고 있던 개념 위에 새로운 정보가 장착되어, 넓은 폭으로 실력이 향상된다.
그것을 흔히 계단형 성장 과정이라 말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성장은 계단형이 아니다.
산등선 같은 모양의 꺾은선 그래프 형식으로 성장하며, 이 부분은 따로 자세히 다루겠다.
충돌구간에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실력이 떨어진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한, 융합기로 가는 길목에서 슬럼프라는 착각을 많이 일으키게 된다.
이 구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성장기 내내 반복된다.
보통 초반에 열정이 넘칠수록, 이 부분에 좌절감을 크게 느끼기도 한다.
의욕적으로 해내고 있는데 계단형으로 잘 성장하지 않으니, 스스와 환경을 의심하게 된다.
사기가 쭉 꺾이면서 의욕을 거짓말 같이 잃어버리기도 한다.
마음을 타이트하고 조급하게 가지면, 일희일비하게 되며 충돌구간을 견뎌내기 힘들다.
급할수록 핵심을 부정하고 외부적 요인을 신경 쓰게 된다.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어떤 스타일로 그려야 되지?’
구체적이지 않은 생각으로 이 기나긴 코스를 완주해 내기 힘들다.
인식의 큰 변화가 필요하다.
단거리 달리기처럼 에너지를 한 번에 쏟아내는 것이 아니다.
단거리 달리기에서는 한 번만 쉬어도 크게 뒤처진다.
마라톤에서는 조금이라도 쉬어갈 수 있는 코스들이 있다.
그 구간들에서 에너지를 분산시켜 조절해 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마라톤을 준비해도 막상 뛰어보면, 일반인은 1km만 가도 폐가 터질 듯 힘들 것이다.
훈련을 반복하며 개선점을 찾고, 완주를 목표로 점차 늘려나간다 생각하자.
하던 방식으로 계속하다 보면 ‘언젠간 되겠지’라는 방치의 자세가 아니다.
막연하게 시간에 맡기는 것이 아닌, 반복되는 중간 코스마다 목적에 맞는 방식의 수행을 거치며, 그 결과는 완주 후에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번 그림에 잘 적용되지 않았던 요소들에서 나름의 이유를 찾고, 해결방식을 구상해 본다.
다음 그림에 해결방식을 실험해 보고, 뚜렷한 성과가 없어도 다른 부분에 다시 대입해 본다.
끊임없이 반복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실패는 늘 존재하는 필수 과정일 뿐이다.
시도하려고 할 때 바로 적용이 안 돼도 괜찮다.
한두 번의 실패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시도는 시동과 같다.
시동 거는 법을 알면, 방법을 익혀가며 운전해 나갈 수 있다.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방법을 체험할 기회도 얻지 못한다.
체험해야 작용이 일어난다. 결국 작용이 쌓여 적용될 것이다.
이 과정들은 절대 느리지 않다.
마라톤 42.195km
경로가 멀다 해서 걸어가진 않는다.
페이스를 조절하며 빠른 속도로 뛰어간다.
여유 있게 간다는 것은 느리게 가는 것이 아니다.
먼 여정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에서 나오는 페이스 조절이다.
나만의 속도를 길게 유지해 끝내 다다른다.
모든 예술 통틀어 그림만큼 전성기가 긴 분야도 드물 것이다.
마음먹으면 평생 전성기를 갱신해 나갈 수 있을 만큼 수명이 굉장히 길다.
마라톤이 갖고 있는 상징성과도 잘 어울리기에 공통점을 작성해 보았다.
그림 마라톤을 같이 완주해 볼 사람은 언제나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