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마를 사랑했다
모든 사람들은 얼굴에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 가면 속 얼굴의 내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가면이 두꺼울수록 그리고 표정이 뚜렷하지 않을수록 우리는 그들의 내면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곤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면’이라는 건 겉으로 보이지 않는, 다시 말해 내면을 가리고 있는 심적 가면을 일컫는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의 시작에서 흘려보내는 ‘소수의 사람만이 현실을 상상할 수 있다.’라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명언은 가슴에 꽤 깊은 울림을 던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실존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의 표정과 대사, 행동 등을 통해 그 속에 담긴 내면을 읽고자 애를 썼기 때문이다. 이번엔 영화의 스토리보다도 인간의 내면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영화 한 편을 얘기하고자 한다. 조 벌링거 감독의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2018)’이다.
영화는 펍에서 만난 따뜻하고 자상한 테드 번디(잭 에프론 분)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싱글 맘 리즈(릴리 콜린스 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싱글 맘으로 평소 자신감을 잃고 살아가던 그녀가 테드를 만나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은 꽤 빠른 전개로 짧고 굵게 소개된다. 그 이유는 감독이 관객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두 사람 간의 관계의 깊이가 아니라 다른 주제에 있었기 때문이다. 화면은 이내 1974년 1~7월 간 주기적으로 발생한 킹카운티 지역의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사건을 교차편집을 통해 조명한다. 그리고 어느 날 테드는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에 붙잡히게 되면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된다.
이 영화의 포인트는 ‘진실은 무엇인가?’에 있다. 이렇듯 사건의 조명은 ‘과정’이 아닌 ‘결론’에 집중하다보니 ‘과정’은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다. 리즈가 살인마를 어떻게 만나게 되고 사랑하게 됐냐는 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작품의 타이틀은 분명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제를 살펴볼 필요 또한 있겠다. 이 작품의 원제는 ‘Extremely Wicked, Shockingly Evil and Vile’로 직역하자면, ‘매우 사악하고 충격적일 정도의 악랄하고 용납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분명히 벌어진 사건이 있고 사건을 행한 진범이 있을진대, ‘그 진범이 누구인가?’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조 벌링거 감독은 마지막 반전을 배치한 후 이를 위해 긴 러닝 타임의 어두운 터널을 거쳐 가게끔 만들어 놓은 것일까? 여기서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지를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시작한 지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살인사건에 대한 집중보도를 하기 시작한다. 테드와 리즈의 사랑은 그 짧은 시간 내에 이미 깊은 관계에 빠지고 난 후이다. 여기에 테드가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게 되면서 그 깊이 또한 수렁에 빠지고 만다. 리즈는 점차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테드는 이에 완강히 거부하게 된다. 두 사람이 캐럴 앤(카야 스코델라리오 분)을 만났을 때 그녀와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 두 사람의 등 뒤에서 그들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후 벌어질 사건 전개에 있어 그녀가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내용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테드는 교도소에 수감되고 이후 콜로라도에 갔었는지 물어보며 자신의 게임은 살인이라고 얘기하는 담당형사의 대사는 분명한 무게를 가진다. 여기에 그와 교차편집으로 리즈에게 전화를 해 온 콜로라도의 마이크 피셔 형사(테리 키니 분)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얘기해도 도움을 받을 일이 없다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그녀의 행동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비단 필자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사실 그녀는 그에 대한 진실된 사랑과 믿음으로 힘들어 하기보다는 그녀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진실게임’에 기반을 둔다. 약 108분의 러닝 타임동안 화면이 보여주는 건 테드가 과연 진범이냐 아니냐를 두고 치열한 두뇌 싸움을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상인 주체는 감독과 관객들이다. 이쯤 되면 추리를 하는 쪽은 관객이 되고 감독은 자신이 가진 패를 모두 펼쳐 제시할 필요가 없다. 무언가 비장의 무기를 마지막까지 들고 가야만 하는 쪽은 감독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관객들은 애초부터 마지막 반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심스레 예측할 수밖에 없는데, 화면은 이 때문에 계속해서 테드의 대사와 표정, 행동 등을 통해 그를 의심하게 만든다. 과연 그가 진범인지 혹은 정말 누명을 쓰게 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이다.
그런 ‘진실게임’ 도중에 한 번씩 삽입되는 트릭은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뉴스와치10 프로그램이 범죄현장의 2백 개 이상의 지문을 조사했지만 그와 일치하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내용이나, 미디어가 재판을 집중 조명하면서 검찰과 경찰이 이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 스타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는 테드의 자신에 대한 변론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방청객들 중 많은 이들이 여성들로 채워지는데, 여성들이 매력 넘치는 그가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으로 인터뷰하는 장면 등은 실제 있었던 사건임을 감안해도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만든다.
영화는 중반부를 지나며 관객들과의 술래잡기에서 보다 멀리 앞서갈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앞에서 언급한 관객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다양한 단서들은 물론, 캐럴 앤과 리즈의 회사 동료인 제리(할리 조엘 오스먼트 분) 등을 배치해 단서를 끄집어내기 위한 역할을 분배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캐럴 앤은 테드를 사랑하며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역할을 맡았고, 제리는 반대로 홀로 남은 리즈의 곁을 지키며 리즈가 스스로 자신의 죄책감을 실토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죄책감에 대한 실토는 후반부에 커다란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방향을 크게 바꾸지 못하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 작품은 테드가 어떤 점에서 유죄가 결정되고 어떤 근거로 법정에서 끌려 다니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와 리즈 간의 감정 소통과 단절에 집중하는 것처럼 화면을 아름다운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거기에 법정에서의 진실공방도 허울 좋은 보여주기 식에 급급할 뿐 논리적으로 파헤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적어도 ‘어 퓨 굿 맨(1992)’ 수준의 법정드라마까지는 못될지라도 진실공방을 좀 더 세심하고 디테일한 측면에서 다뤄줬다면 관객들이 감독의 연출 의도에 좀 더 쉽게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클라이맥스에 다가가면서 리즈가 밝힌 죄책감에 대한 고백은 지금껏 끌고 왔던 그와 그녀와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왜 그녀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지, 그가 억울한 누명을 덮어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제대로 벗겨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제대로 된 진범은 누구인지에 영화는 후반부를 집중적으로 할애한다. 놀라운 진실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도 당연하고 말이다. 사실 테드에게 있어 재판은 시종일관 가벼운 게임 정도로만 여겨졌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적어도 어느 정도의 신뢰를 주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화면 자체가 그러하기 보다는 테드 번디 스스로 재판을 그렇게 만들어 가는데, 영화를 보는 시각에서 그 자체가 테드에 대한 억울한 누명을 벗길 수 있을 만큼의 영화적 재미를 위한 연출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부분이다. 놀랄만한 사실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실제 사건 당시의 관련 영상이 함께 나오는데, 실제 인물인 ‘테드 번디’가 했었던 말투와 행동 그대로 배우 잭 에프론이 최대한 이를 존중해 연기를 펼쳤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감독의 재미를 위한 긴장감과 연출보다는 실제 사건의 사실적인 부분을 존중해 만들었다는데 놀라운 경의를 표하면서, 이 점 또한 색다른 볼거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비춰볼 때,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 사건 당시의 모든 정황을 최대한 존중해 제작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그 가치가 빛을 가진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 속에서 관객들을 진실게임의 무대 위로 끌어올리고 관객들의 두뇌회전에 여러 사실적인 트릭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재미를 높였다는데 감독의 연출력과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알면서도 헷갈릴 수밖에 없는 ‘영화를 보는 재미’가 돋보이는 작품, 영화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2018)’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