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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Mar 08. 2021

우리집 강아지의 정체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

"(속닥)누렁소는 일을 잘하고 말도 잘 듣는데, 검정소는 꾀가 많아 다루기가 매우 힘듭니다."

"뭐 그런 걸 귓속말까지 합니까?"

"자기 흉을 보는데 검정소가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조선 초 세종 시대를 살았던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다. 동물도 사람처럼 자기 험담하는 걸 들으면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수상록>을 집필한 16세기 사상가 몽테뉴는 자신의 저서에 이런 질문을 집어넣었다. "내가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을 때, 실제로는 고양이가 나와 놀아주는 게 아닐까?" 옛 성인들은 동물이 사람과 같다는 걸 일찌기 알아보았다.



우리집에서는 아이가 제일 먼저 강아지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림책을 읽어주다보면 주인공이 대부분 동물이다. 그들은 사람처럼 용기, 우정, 사랑, 미움, 슬픔, 기쁨, 즐거움, 그리움 등 모든 감정을 느낀다. 아이는 그림책을 통해 동물들과 교감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물을 의인화했고, 곧바로 우리집 강아지에게 적용했다.



처음엔 강아지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그 다음엔 대화를 시도하더니, 이제는 책을 읽어주고 함께 기차 놀이를 한다. 재미있는 건 그때마다 보이는 강아지의 반응이다. 인사를 하면 꼬리치고, 대화를 시도하면 자다가 일어나 다가와서 유심히 듣는다.



책을 몇 번 읽어주었더니 잠자리 독서 시간이 되면 어느 틈엔가 아이와 나 사이에 엉덩이를 낑겨 넣고 함께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가 기차 놀이를 시작하면 넓은 거실 놔두고 굳이 기찻길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트랙의 일부로 변신을 시도하기도 한다.



나는 아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언젠가부터 강아지가 하는 말이 내 귀에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신문을 읽고 있으면 강아지가 다가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말이 들린다. "엄마, 목 말라요." 가보면 물통에 물이 떨어져 있다.



내가 설겆이를 하고 있으면 다가와 또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면 또 말이 들린다. "엄마, 똥 쌌어요." 가보면 역시나 똥을 싸 놨다. 입 밖으로 말을 내지만 못했지 사람처럼 의사 표현을 정확히 다 한다. 그럴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저 녀석, 강아지의 탈을 쓴 사람이 아닐까?



곰도 백일동안 마늘만 먹으면 사람이 되는데, 이 녀석은 우리집에서 내가 주는 밥만 9년을 먹었으니 이제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기왕 사람이 될 거면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에 나오는 개처럼 재테크 정보를 콕 집어주면 좋으련만.



그래도 우리집 강아지가 최고다. 돈을 알려주진 못하지만 삶이 쓸쓸하거나 힘겨울 때 꼭 껴안으면 가슴 속 깊이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면서 이런 말소리가 들린다. "엄마, 외로워하지 말아요. 내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 그러면 또 나는 진심으로 위로를 받는다. 역시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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