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창가 Aug 05. 2021

프리랜서가 일을 거절했더니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면 워라밸은 백 프로 깨진다. 프리랜서는 일한 만큼 버는 구조라서 일 들어올 때 하는 게 정답이다. 이기주 작가는 그의 책 <글의 품격>에서 프리랜서란 자기만의 창을 가지고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고달픈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슬픈 이야기지만 프리랜서는 일이 프리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장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프리한 사람이다. 잘 나가는 전현무 아나운서도 어느 예능 프로에 나와서 프리랜서의 삶이 쉽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



나는 번역 프리랜서로 주로 두 군데 회사에서 일감을 의뢰받는다. 한 곳은 한 작품 계약하면 최소 1년 이상 유지되는 일이라서 프리랜서치고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다. 문제는 나머지 한 곳이다. 여기서는 길어야 한 달 반, 주로 한 달 이내의 짧은 프로젝트를 준다. 그래서 한 달 후가 보장되어 있지 않고, 일감이 언제 얼마나 들어올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머피의 법칙은 언제나 프리랜서를 떠나지 않는다. 일이 많을 땐 몰려서 들어오고 일이 없어서 손가락 빨고 있을 땐 아무리 기다려도 일이 안 들어온다. 지금도 올 3월부터 일이 밀렸는데 몇 달 내내 연락이 없던 회사에서 6, 7월에 몰려서 일을 의뢰하는 바람에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프리랜서는 일 들어올 때 받는 게 답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고 싶어서 받고, 받고, 받았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들어온 일을 거절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일이 겹쳐서 못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니 일이 겹칠 때도 잠과 식사 시간을 줄였지 언제나 '가능하다'라고 답변을 보냈다.



그리고 폐인이 될 때까지 일했다.



그런데 한 달쯤 전부터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도 누우면 잠이 들지 않았고, 머릿속에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멍한 느낌이 지속됐다. 그 상태로 종일 좀비처럼 번역만 했다. 머리, 어깨, 목, 팔, 손목, 손가락, 허리 안 아픈 곳이 없고, 하도 키보드를 두드려서 손가락에 경련이 일기도 했다.



어느 날, 또다시 열흘짜리 프로젝트 의뢰 메일이 메일함에 들어왔다. 그 메일은 보자마자 든 생각.



더 이상은 도저히 안 되겠다.



이대로 살다가는 정말로 폐인 될 것 같았다. 또 글 쓸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데 생업에 밀려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프로젝트라서 정말 정말 아까운 일감이었지만, 시리즈물이라서 계속 받기만 하면 수입도 제법 좋은 일감이었지만, 고심 끝에 과감히 포기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거절의 메일을 보내는데 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어찌나 망설여지던지. 프리랜서가 일을 거절한다는 것은 앞으로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리스크를 걸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감히 일감을 거절했다. 그렇게 거의 처음으로 일감을 거절했는데 그 이후 내게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날아갈 것 같았다! 몸이 편해지고 덩달아 마음이 편해졌으며 일상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반찬을 할 시간이 생겼다.



번역에 치여 살 땐 아이에게 매일 계란 후라이(익히기만 하면 됨)와 김치(어머니가 주심), 아니면 김(사다 놓기만 하면 됨)으로만 이루어진 밥상을 차려주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미역국을 끓였다. 멸치도 볶았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인 콩조림도 정성껏 했다. 미역국을 끓이려고 미역을 불리는데 이게 행복이지, 싶은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거절한 일감을 환산해 보니 돈 백이 좀 넘는 금액이었다. 그깟 돈 백이 뭐라고, 그렇게 폐인처럼 육아고 살림이고 건강이고 다 팽개치고 일했는지. 나는 멸치를 볶으면서 일을 거절한 기특한 나를 속으로 무한정 칭찬해 줬다.



그 회사에서는 거절의 메일 이후로도 계속 일감을 의뢰했다. 기왕 쉬기로 마음 먹은 김에 꼬박 한 달은 쉬고 싶었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신나게 거절했다. 백이 이백이 되고 삼백이 됐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연달아 세 번 더 거절하자 더 이상 메일이 오지 않았다. 거기서 언제 다시 일감 의뢰가 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돈 좀 덜 벌더라도 조금이라도 자유 시간을 갖고 아이에게 맛난 아침밥 차려줄 수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



토니 로빈스는 그의 베스트셀러 저서 <네 안의 잠든 거인을 깨워라>에서 성공을 이렇게 정의했다.



"성공이란 당신이 원하는 때, 당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과,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날 기다려주는

진짜로 프리한 삶을 꿈꾸며...






작가의 이전글 러닝머신으로 서핑 해봤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