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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Jul 27. 2021

열대야에 이런 ASMR 어때요?


Illustration: Ana Yael (출처: Oprah.com)



벌써 몇 번째 화장실과 부엌을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식탁 위 벽시계는 한밤중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엊그제 배에서 내려 꿈에도 그리던 내 방 내 침대에 누웠건만 잠이 들지 않아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선해서 며칠 동안은 빼놓지 않고 겪게 되는 ‘시차 적응’ 같은 시간이었다. 외국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사람들이 시차 적응으로 한동안 애를 먹듯 소현은 배에서 내리면 며칠 동안은 육지의 고요함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귀가 어느새 선박 기관실의 무지막지한 소음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선박 기관실의 소음은 매우 심하다. ‘매우’라는 표현이 막연한데 어느 정도냐 하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다. 기계들이 많은 곳이니 기계 돌아가는 소음은 당연하지만 정말 직접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시끄럽다. 귀가 먹먹해지는 수준의 소음이 24시간 지속되다 보니 당연히 청력 손실의 위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기관사들은 일할 때 귀마개를 필수로 착용한다. 40도가 넘는 사우나 같은 열기에 귀마개까지 착용하려니 한여름에 털모자와 털옷을 입고 일하는 것처럼 괴롭다.     





그런데 남들은 모두 괴로워하는 소음이 소현에게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현은 원래부터 남의 말을 한 템포 늦게 알아들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사오정’이라는 놀림을 받곤 했다. 그래서 시끄러운 기관실에서 상사의 지시를 못 알아들을까 봐 지레 걱정했다. 하지만 배를 타고 보니 그건 기우였다. 기관실이 상상을 초월하게 시끄러워서 어차피 다들 말을 못 알아들었다. 아예 귀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서로의 입 모양을 읽거나 수신호로 대화했다. 덕분에 말귀 못 알아듣는다는 질책은 들은 적 없었다. 소현은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걱정을 한방에 해결해준 소음이 그렇게 듣기 싫지는 않았다.     






기관실을 나와도 소음은 따라다닌다. 배 전체에 항상 잔 소음 같은 것이 있다. 아무래도 기계들이 돌아가다 보니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실제로 소음 때문에 없던 불면증이 생겨 고생하는 선원도 꽤 있다. 소현은 다행히 원래 소음에 민감한 편이 아니어서 기관실의 소음 말고는 잘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가족에게 허락된 방선(배를 방문하는 것) 때 승선한 엄마는 소음 때문에 밤새 한잠도 못 주무셨다. 다음날 엄마는 잠을 못 자 빨개진 눈으로 소현에게 물었다.     




“소현아, 이 소리 안 들려? 넌 이렇게 시끄러운 데서 잠이 오니?”     




소현이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꿀잠을 잔다는 걸 잘 아는 엄마조차 각종 소음에도 개의치 않고 쿨쿨 자는 소현을 신기해했다. 이럴 땐 정말 자신이 타고난 뱃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멀쩡한 사람에게 불면증을 유발하는 소음이 들리지 않는 천의 귀를 가졌으니 말이다.     




소음을 느낀 건 배 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배에서 내린 다음이었다. 10개월 간의 항해를 마치고 드디어 육지에 내렸는데 뭔가 이상했다. 늘 드나들던 인천항이 유독 낯설었다. 소현은 한참 만에야 어색함의 정체를 발견했다. 주변이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육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일상 소음이 상당하다고 느끼지만 배에서 생활하는 소현에게는 물속처럼 고요했다. 그제야 소현은 배 위의 소음이 상당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잠들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항상 들리던 소음이 없으니 허전함이 밀려왔다. 선원들과는 반대로 육지 불면증 비슷한 게 찾아온 듯했다. 우웅-- 하고 돌아가는 기계음이 ASMR처럼 귓가에 울려야 잠이 잘 오는데, 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났다. 육지의 내 방보다 시끄러운 배의 잠자리가 더 편해진 걸 보니 정말 뱃사람 다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에 ‘잠 잘 오는 ASMR’을 검색해서 이거 저거 틀어봤지만 잠이 오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선박 기관실 소음 ASMR은 없나. 다음 항차엔 기관실에서 소음을 녹음해서 하선한 다음 틀어놓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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