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코로나로 벚꽃 축제가 취소됐다. 작년에도 벚꽃길을 걷지 못 했는데 1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니 그저 슬플 따름이다. 계절의 아름다움을 즐길 자유조차 빼앗긴 요즘 추억 속 벚꽃을 떠올리는 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처럼 아련하다.
세상에 코로나가 없던 그 해, 나는 벚꽃 축제에 처음으로 가봤다. 원래 지나치게 붐비는 곳은 즐기진 못 하고 지치기만 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잘 가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그 날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윤중로 벚꽃 축제에 가기로 했다.
아이를 데리고 매년 뉴스에서만 보던 여의도 윤중로에 도착했다. 그날은 벚꽃 축제의 최고 하이라이트인 토요일이었다. 북적거리는 축제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가는 길이라서 사실 설레기보다는 긴장이 됐다.
엄마 손 절대 놓으면 안돼, 쉬 마려우면 미리 말해, 다리 아파도 의자 없어, 엄마 허리 아파서 못 업어줘, 까까는 한 개만 사 줄 거야......
주말에 일하러 나간 남편 대신 혼자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길이라 행여나 잃어버리기라도 할까봐 초긴장 상태였다. 내 입에선 평소 안 하던 잔소리가 쉴새 없이 나왔다.
4월 첫 주 날씨는 아직 추웠다. 감기라도 걸릴까봐 내복을 껴 입혔는데 아이가 더운지 지하철 입구에서부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지하철 역에서 윤중로까지는 내 걸음으로는 5분, 아이와 함께라도 10분이면 닿는다. 아이가 징징거리자 그 길이 구만리처럼 느껴졌다. 더디게 걸어가면서 그냥 돌아갈까, 수십번 고민했다.
그때 어디선가 장범준의 '벚꽃엔딩'이 들렸다. 감미로운 멜로디를 따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눈앞에는 하얀 눈꽃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비현실적이었다. 매년 봄 윤중로를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멀리서 볼땐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영화 '러브레터'의 하얀 설산 같았다. 차갑지 않고 따듯한 설산.
엄마가 걸음을 멈추자 아이가 올려다봤다.
저기야, 얼른 가자.
나는 번쩍 아이를 업었다. 다섯 살 꼬마는 제법 묵직했다. 허리 아파서 못 업어준다고 선포한 엄마가 알아서 업어주자 아이가 활짝 웃었다. 나도 웃었다. 하얀 벚꽃이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그 안으로 홀린 듯 빨려 들어갔다.
주말 벚꽃축제의 피크를 맞은 윤중로는 별천지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벚꽃엔딩은 기본이었고, 인디밴드의 가요, 일반인이 부르는 팝송 경연, 아마추어들의 힙합 공연을 보며 내지르는 관중의 함성, 이벤트를 알리는 안내 방송 등 온세상 소리가 다 모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하나도 시끄럽지 않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흐드러진 벚꽃 아래에선 모든 것이 용서됐다. 내 귀는 순식간에 여러 개의 길을 만들어 그 소리들을 제각각 따로 받아들였다. 하나하나 또렷하게 들려서 신기했다.
점점 팔이 아파오자 일단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때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솜사탕 장수가 보였다. 얼른 가서 하나 샀다. 벚나무처럼 새하얗고 커다란 솜사탕이었다. 아이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순간, 바람이 살랑 불어오면서 아이 머리 위로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정말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시인이었어야 했다. 그 아름다움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편의 시였다. 나도 모르게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런데 벚나무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나도 모르게 솜사탕을 손가락으로 잡았었나 보다. 핸드폰이 끈적거렸다. 아이는 솜사탕은 안 주고 핸드폰만 뒤적이는 나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사탕을 향한 아이의 욕망을 가볍게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솜사탕을 덥석, 잡은 것이다.
오 마이 갓!
고사리 같은 아이 손에 솜사탕이 뭉텅이로 묻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그걸 잘 아는 아이가 내 눈치를 봤다. 나는 멀쩡한 다른 손으로 재빨리 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물티슈를 빼놓고 왔다. 어떡하지, 약 5초간 고민하던 나는 에라 모르겠다, 그대로 내 손가락을 빨아먹었다.
달콤했다. 한번 더 빨아먹었다. 대강 끈적거리는 걸 수습한 다음 아이 손도 빨아먹었다. 아이는 순간 멈칫하더니 갑자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자기도 빨아먹기 시작했다. 그 조그만 손을 우리 둘이서 아주 싹싹 빨아먹었다. 아이가 깔깔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화냈을 상황인데 엄마가 장난을 치니 아이도 좋았나 보다. 그 기세를 몰아 솜사탕을 크게 떼어 아이 입에 넣어주었다. 나도 한 입 크게 먹었다.
아, 맛있다!
아직도 끈적거리는 손을 꼭 맞잡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솜사탕을 다 먹어치웠다. 그 장면이 꼭 꿈 속처럼 느껴졌다. 폭신폭신한 구름을 타고 따듯한 눈이 내리는 무릉도원에서 산해진미를 맛보는 꿈.
자연은 참으로 위대하다. 모든 걸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마음을 선사하니 말이다. 원래 잠깐 구경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나는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날 끈적거리는 손으로 아이를 안고 업고 다리가 부르트도록 걸었던 윤중로는 외국의 그 어떤 멋진 곳보다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