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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Apr 12. 2021

바람난 남편 때문에 이렇게 된 그녀


B는 내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언니였다. 자상한 남편 만나 잘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 울면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전화로도 위로해 줬고 만나서도 위로해줬고 심지어 B의 남편 사무실 근처 편의점에 가서 바람난 여자를 관찰하고 오기도 했다. 그는 사무실 같은 건물 1층 편의점 알바하는 여자와 바람이 났었다.



결국 B는 남편과 이혼했다.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는 친정 언니가 있는 호주로 보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다시 B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집 근처에 왔으니 잠깐 보자는 것이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얼른 달려 나갔다. 자그마한 몸집의 B는 자기보다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평소 화장기 없이 운동화 끌고 다니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날은 짙은 화장에 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나왔다.



자리에 앉자 B는 가방에서 커다란 서류를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보험 신청서였다. 그제야 나는 B가 어느 보험 회사에 취직했다는 걸 알게 됐다. 서로 바빠서 그간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좀 당황했다. 왜냐하면 친척 중에 보험 설계사가 있어서 이미 내 이름으로 가입된 보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B가 쭈뼛쭈뼛 내미는 상품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인, 즉 내가 이미 다른 보험사에 들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선뜻 대답을 못 하자 갑자기 B가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나는 괜히 미안해졌다. 안 들려고 한 게 아니라 남은 쥐꼬리만 한 돈이나마 어떻게 쪼개서 하나라도 들어줄까 고민하던 차였다. B는 서럽게 울면서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 속 B는 보험 하나 팔아보려다가 소꿉친구와 우정이 깨졌고, 부모님한테 부끄럽단 말을 들었고, 동창회에서 꺼리는 사람이 됐다. 세상이 이렇게 매정한 줄 몰랐다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데 나까지 같이 울 뻔했다.



B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으로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며 착실히 살아가던 평범한 주부였다. 그땐 맨 얼굴에 로션만 발라도 빛이 났는데 내 앞 B의 얼굴은 두꺼운 화장을 칠해놓아도 칙칙하기만 했다.



B를 달래주던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언니 실적에 제일 도움되는 상품으로 줘 봐."



그렇게 나는 B의 첫 고객이 됐다. B의 말을 빌자면 취직 4개월 만의 첫 계약이라고 했다. B는 계약서를 쓰면서 펑펑 울었다. 4개월 동안 마음이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안쓰러웠고, 그 지옥불을 내가 조금이라도 꺼준 것 같아 뿌듯했다. 나는 무리하게 총 4개의 보험을 가입했다.



돕고 싶은 마음이 앞서 보험료를 나의 능력 초과로 책정한 탓에 그 이후 매달 보험료를 납입하느라 허덕였다. 다른 통장에서 빼 와서 넣은 적도 있었고, 밀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B를 생각하며 악착같이 유지해 만기 10년을 채웠다.



B는 그 10년을 훌쩍 넘긴 12년 동안 같은 회사에 근무했다. 그 사이에 멋진 남자 친구도 생겼고, 회사에서 상도 여러 번 탔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B는 나와의 첫 계약으로 자신감을 회복했고 그 이후 신기할 정도로 보험 계약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B가 돈이 없어서 이것밖에 못해준다면서 이실직고한 이태원 표 루이뷔통 '짝퉁' 지갑은 아직도 잘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B를 위해 무리하게 들었던 나의 보험도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다. 무엇보다 B는 힘들었던 과거를 잊고 누구보다 밝게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누군가를 이롭게 한 적이 있다면 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보험 계약을 결정한 일일 것이다. B의 행복한 앞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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