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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Apr 13. 2021

그 시절 나를 좋아해 줬던 남학생들에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中


요즘 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교실에서 인기투표라는 걸 했다. 종이에 일일이 수기로 이름을 적어 '바를 정(正)'자로 표기했다. 반장 선거 같은 것과는 별개로 순전히 재미로 했는데 말 그대로 은근히 재미있었다. 봄이라서 그런가 오랜만에 우리 반에서 있었던 인기투표가 떠올랐다.



나는 익숙한 중학교 친구들과 이별하고 홀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누구나 새 학년 새 학기엔 부담감을 갖고 시작한다. 나 역시 아는 친구 하나 없는 새로운 학교에서 첫날부터 무척 긴장했다.



게다가 내가 다닌 학교는 당시엔 보기 드물게 남녀 합반이었다. 중학교도 남녀 공학이었지만 반은 분리돼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열일곱 살은 옆자리 남학생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나이다. 안 그래도 적응할 것 투성이인데 남학생들이 한 반에서 같이 생활하는 난관(?)까지 극복해야 했다.



빨리 적응하기 위해 나는 학생으로서의 정공법을 선택했다. 내 본분인 공부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적응의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동시에 옆자리, 앞자리 친구들과 조금씩 친분을 터 나갔다. 내 고등학교의 첫 봄은 어색함과 그 어색함을 타파하려는 나의 노력으로 점철됐다.



그래도 뭔가 편안하지 않던 4월 어느 저녁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한창인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간간히 문제집 넘기는 소리, 샤프가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갑자기 뒷자리 친구가 날 툭툭 치더니 접은 종이를 하나 넘겼다. 뭔가 하고 펴 보았다. 맨 위에는 큼지막하게 '1학년 1반 여학생 인기투표 결과'라고 적혀 있었다.



뜬금없이 이게 뭐지? 하고 읽어 내려갔다. 종이엔 우리 반 여학생들 이름이 전부 쓰여 있었고, 각 이름마다 옆에 바를 정자가 표기돼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 1, 2, 3등이 누군지 나와 있었다.



난 내 눈을 의심했다. 1등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다시 읽어보았다. 남학생들이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재미로 한 인기투표 결과지 같은 것이었다. 짓궂게도 굳이 이걸 여학생들 분단 쪽으로 돌린 것이다.



당시 나는 조용히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다. 동그랗고 큼지막한 하니 안경을 쓰고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은 채 매일 똑같은 팥죽색 잠바만 입고 다녔다. 또 여자 친구들과는 어느 정도 친해졌지만 남학생들은 아직 이름을 모르는 친구도 있을 정도로 내외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어떻게 날 알고 1위로 뽑아준 것이었다.



나는 관심 없는 척 종이를 접어 앞으로 넘겼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구름 위로 둥둥 떠올라 있었다.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으려다가 누가 볼 새라 얼른 입을 다물고 공부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문제집 글씨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내가 그 종이를 본 건 아마 길어야 2, 3분 정도였을 것이다. 그 2, 3분이 잠자고 있던 나의 자존감을 깨워주었다. '날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보여도 주변에서 좋아해 주는구나'라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낯선 환경에서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고 초조했는데 "너 아주 멋져"라고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나의 행복한 마음과는 별개로 다음 날 남학생들은 담임 선생님에게 단체 기합을 받았다. 그런 '쓸데없는' 장난으로 여학생들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은 말인데 여학생 중 한 명이 선생님한테 가서 울면서 일렀다고 한다. 그 바람에 우리 반에서 두 번 다시 인기투표는 없었다.



하지만 그 '쓸데없는' 장난으로 나는 완벽하게 자신감을 찾았다. 그 뒤로는 매사가 일사천리였다. 고등학교 3년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될 만큼 알찼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았고 공부도 잘했다. 나는 어른으로 치면 일도 사랑도 성공한 그런 학생이었다. 그 첫 단추는 1학년이 시작된 봄날 같은 반 남학생들이 보낸 인기투표 쪽지였다.



한 번도 그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못했었다. 사실 이게 감사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어색하고 불안해하던 내겐 정말 잊지 못할 선물이었다. 지금이라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1학년 1반 남학생들아, 잘 살고 있니? 그때 인기투표에서 날 1등으로 뽑아줘서 고마웠어. 정작 너희는 잊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덕분에 고등학교 3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단다. 지금은 너희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희가 선물해 준 소중한 추억만큼은 영원히 잊지 않을게.  늦었지만 정말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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