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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 PostModern Mar 26. 2024

그게 전부가 아니야 : 경직된 사고

 지금도 어린 나이이지만, ‘미성년자’ 일 때는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는 편이었다. 어른들의 말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말이 옳다고 생각했고, 맞다고 생각했다. 그 말대로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벌벌’ 떨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그러나 법적으로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가 되는 ‘19살’이 되면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소위 말해서 ‘머리가 커진 것’이다. 어른들의 말‘만’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관이 강해졌다.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기는 어른들-기성세대라 불리는 이들-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내가 하는 생각은 의심으로 일축되었고 묻는 질문을 따져 묻는 것으로 취급됐다. 내가 따져 물었기 때문에 답해주지 않는 것인지, 답할 수 없는 것을 물었기 때문에 따져 묻지 말라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기성세대가 볼 때, 불순종적인 내용의 글을 쓰고자 한다. ‘이 세상에 옳은 인간은 없다’라고 외치는 ‘볼 것 없는 글’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나의 사고는 편향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편향적이다라고 하면 일반화의 오류다. 반대로, 인간은 편향적이다. 따라서 나도 편향적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어딘가 빈약한 듯한 논리다. 분명한 것은 ‘대체로’ 편향적이다. 평소에 ‘그게 전부가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때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라는 말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내면-에 대해 말한다. 그저 추상적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겉모습에 치중하지 말라는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지만, 여기서 나는 반문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 보이지 않는 것도 다가 아니야.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라는 말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다가 아니야’라는 말이 어울리며, ‘참’이라고 할 수 있다. 내면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면에만 집중하는 것은 미련하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전부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적인 것 아닌가. 이 세상에는 ‘전부’라고 할 만한 것이 객관적으로 없다고 할 수 있다. 선언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역겨움을 느낀다. 

 나는 이렇게 봤어. 말할 때, 내가 옳다는 식의 선언 또는 단언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냥’ 내 생각이고, 내 느낌이다. 강요하는 것도, 이것이 전부라고 항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태도를 전제하고자 몸부림친다. 인생은 다양하고, 다채롭다. 수많은 모습이 있다. 인간의 다채로움에 ‘이렇게 해야 해’ 또는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만 남으면 경직된 사고를 불러오는 것 같다. 수많은 색이 공존하게, 어우러지게 해야 한다. 그것을 ‘하나’로 만들겠다고 섞어버리면 검은색, 회색만 남는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라고 말하기보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의 편향이 타인의 경직으로, 나의 고집이 타인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만큼 폭력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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