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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EGG 안티에그 Aug 12. 2024

사진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지의 삶과 죽음을 통해 보는
르포르타주 사진의 명과 암

#그레이

문화예술을 둘러싼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탐구합니다.



Edited by 유진


회화와 사진을 아우르는
이미지의 세계


이미지의 탄생은 죽음과 결부된 면이 있다. 어쨌든 분묘에서 나타나는 고대의 이미지란 죽음에 대한 거부이자 영생을 위한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죽음이 잊히면 잊힐수록 그만큼 이미지의 생동감도 떨어지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요구도 덜 절실해진다.

_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전쟁화가 폴 들라로슈는 1839년 프랑수와 아라고가 프랑스 학사원에서 사진의 발명을 공표한 날, 그 광경을 바라보며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긴다.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


폴 들라로슈가 회화의 죽음을 선언한 것은 아마 그가 전쟁화가였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20세기 이후 어떤 신문도 특종 사진을 1면에 싣지, 특종 ‘스케치’를 싣지 않는다. 회화는 죽지 않았으나, 적어도 뉴스와 저널리즘에서는 저 뒤로 밀려나 아마 뒤에서 3번째 장 정도 되는 ‘아트’ 섹션에 간신히 발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폴 들라로슈의 말에는 화가의 절망과 예언뿐 아니라, 어떤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회화와 사진은 모두 이미지를 다룬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미지의 어원인 라틴어 이마고(Imago)는 죽은 이의 얼굴을 밀랍으로 떠낸 것을 뜻한다. 결국 이미지는 항상 죽음 뒤에 남겨진 것이며 인간이 매 순간 펼쳐지는 죽음, 시간의 흐름에 저항해 남기고자 한 것이다. 포착된 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회화로 그려진 순간도, 사진에 찍힌 순간도 모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모든 것은 죽어있다.


결국 회화는 죽었다는 들라로슈의 선고 역시 어찌 보면 비통한 탄식이 아닌, 당연한 사실을 읊조린 것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회화든 사진이든 그 위에 얹어진 이미지는 전부 죽음 이후에 탄생하는 불운한 유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유령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죽어도 죽지 않는, 죽음 이후의 삶을 살아간다. 이미지의 세계는 항상 죽은 것들이 다시 출몰하는 귀신 들린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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