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적인 행복의 정의는 '너무 힘들지 않은 일을 하면서, 꽤 괜찮은 연봉을 받고, 일 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을 떠나고, 내킬 때 맛있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내 취향과 타인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로 나와 내 주변을 꾸미는 것.' 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추가하면 조금 더 윤리적인 행복이 될 수 있겠네요.
통속적인 행복을 비슷하게나마 흉내를 내 본 적이 있습니다. 남들이 좋다는 여행지, 좋은 식당 그리고 좋은 사치품들을 나름대로 누려 본 경험은 있으니까요. 처음엔 짜릿했고, 그다음엔 욕심이 났고, 결국엔 권태로웠습니다. 지속할 수 없다는 막막함,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막연한 직감 따위를 느꼈습니다. 생각보다 별거 없다는 허탈감도 컸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경제적으로 아주 여유가 있었다면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습니다. 탈레스의 신 포도인 걸까요? 성공의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저로선 상상만 해볼 뿐입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 속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고갈되고 삶은 권태로워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든 노동의 대가로 번 돈을 소비하며 기를 쓰고 행복을 사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으로 산 행복의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행복은 권태가 되고 다시 고통으로 회귀합니다. 새로운 물건이 지겨워지고, 새로운 여행 장소와 음식이 덜 매력적인 이유입니다. 고통과 권태의 굴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알면서도 무시하고 버티며 사는 사람은 괴롭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굴레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다른 상상을 하겠지요.
돈을 버는 행위나 돈 자체의 미덕을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돈이라도 있어야 남들이 말하는 행복을 사볼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경험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숭고합니다. 돈을 허투루 써보고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경험하는 것 자체가 배움입니다. 무엇보다 돈이 있으면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남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철학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도 부모님의 자산 때문이었습니다. 돈이 주는 혜택은 분명합니다. 다만 돈을 왜, 어떻게, 누가 쓰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남들이 바라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서 흥미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가 제 삶에 던져지는 과제의 수준과 제 능력과의 괴리 때문인지, 아니면 배가 불러서인지(오해하진 마세요. 제가 뭐 대단한 걸 가진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기대치가 무척 낮은 편입니다. ), 아니면 제가 상상하는 행복의 정의가 유별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 상상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발칙한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제주도에 간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소리가 "돈이 많으신가 봐요?"입니다. 사람들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게으른 것 같습니다.
남들이 좇는 것들에 흥미를 잃고, 일에서 열정을 느낄 수 없고, 가족과 함께 어디서 뭘 하든 상관이 없다면, 용감한 짓을 할 때가 됐다는 뜻입니다. 행복은 스스로 선택하고 경험하고 상상하면서 만들어가야 합니다. 권태롭게 돈 벌며 소비하는 삶보다는 고생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편이 제게는 더 의미가 있습니다. 결과가 어찌 되든 적어도 시간 낭비는 아니니까요.
우리가 기를 쓰고 피하려는 고생이나 힘듦 속에 삶의 본질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고생은 기꺼이 안아줘야 할 미덕입니다. 개고생하고 먹는 컵라면의 맛이 훨씬 맛있는 이유입니다. 제 삶이 조금 더 맛있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