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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의미

나 다시 돌아갈래

by 삽질

20살,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유학 중인 누나를 보러 영국으로 갔습니다. 제 기억 속의 첫 진짜 여행이었죠. 모든 게 어색하고 낯설었던 영국 여행을 시작으로 여행의 맛을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결국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저를 소개할 만큼 여행에 빠졌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경험하는 새로움과 설렘은 제 마음의 양식이고 제 삶의 자양분이었습니다. 파리에 다녀오면 몇 달을 파리지앵처럼 고상하게 바게트를 뜯었고 인도에 다녀오면 구질구질한 히피가 되곤 했었죠. 그만큼 순진하고 순수했습니다. 여행을 안 하고 사는 건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20대에 다녔던 여행은 낭만 그 자체였습니다. 20대의 젊음은 값진 자산이었습니다. 어느 여행지를 가도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은 대부분은 20대였습니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앞날을 걱정하는 불안한 눈빛들을 서로 공유하며 낯선 나라에서 우린 하나가 됐습니다. 성숙하지 않은 풋풋함을 어떻게든 감추며 여행지에서 조금씩 성장하기도 했죠. 형님, 누님을 만나면 귀여움을 받으며 졸래졸래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제 기준에 어른이었던 형님, 누님들이 주는 편안함이 좋았습니다. 젊음이라는 프리패스 티켓을 손에 쥔 채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았습니다. 어딜 가든 주인공이 된 것 같았습니다. 여행할 맛이 났습니다.


귀여움을 받던 낭만 여행자는 동생들을 챙겨야 하는 어엿한 형님, 어른이 되어갔습니다.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해도 주위의 반응은 전과 달랐습니다. 어느새 제가 누리던 젊음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속상한 마음도 들더군요.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데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보다는 조용한 곳을, 한인들이 없는 로컬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다녔죠. 외로움과 고독을 즐긴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이게 여행의 멋이라고 다독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론 여유 있게 보이길 바랐지만 초라해 보이진 않을지 눈치도 많이 봤습니다. 30대 초반에 4주가량 혼자 했던 유럽여행을 돌이켜보면 참 궁상이었구나 싶습니다.


돈도 생기고 애인이 생기면서 혼자가 아닌 여행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여행은 그동안 제가 여행이라고 정의했던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 여행이었죠. 휴양 혹은 바캉스라고 불려야 할 행위들이었습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치 있는 것이니까요. 좋은 호텔, 식당을 즐기며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바뀌듯 고난의 여행에서 낭만을 찾던 청춘은 휴양을 즐기는 아재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제 취향은 더 견고해졌죠. 그만큼 제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줄고 사람들과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항공권을 검색하고 새로운 나라를 찾아봤습니다. 이유나 목적 따윈 딱히 없었습니다. 여행은 어느새 제 일상이고 습관이었기 때문이죠. 여행이 쉽고 편해지면서 여행에서 느끼는 권태로움은 더 커졌던 것 같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문득 내가 왜 여행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딱히 답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쇼핑중독자가 쇼핑을 끊기 어려운 것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여행을 끊지 못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사실 어느 순간부터 여행이라고 말은 하지만 집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이력이 조금 더 늘었을 뿐이었죠.


여행은 제게 부족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행위였던 것 같습니다. 제 나이와 상태에 따라 원하는 것들이 달라졌을 뿐 목적은 비슷했던 것이죠. 20대 청춘시절 여행을 하면서 제가 채울 수 있었던 것들은 꽤나 인생에 가치 있게 남길 수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은 오히려 소모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의미보단 관성이 앞섰고 내면보단 외면에 더 중점을 뒀습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진 것이죠. 더 이상 이런 여행에 힘을 빼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전 여전히 여행을 사랑한다고 믿고 삽니다. 다만 제가 잃어버렸던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되찾고 싶습니다. 여행에 진정성을 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가족과 함께 그런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제가 20대에 느꼈던 여행의 설렘과 낭만을 가족과 함께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겠지요. 제 삶에서 다시 여행이 시작됐으면 좋겠습니다. 험난하고 거칠지만 낭만이 있고 의미가 있는 그런 진짜 여행 말입니다. 그래서 기억에 딱! 박히는 그런 여행을 말입니다. 욕심을 부리자면 제가 살고 있는 일상을 여행처럼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삶도 여행이 될 수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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