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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개월 남자아이 관찰기

by 삽질

22년 2월 9일에 태어난 제 아들 녀석은 곧 탄생 42개월을 맞이합니다. 매일 보는 녀석이라 별 감흥이 없다가도 3년 전 오늘 같은 아이폰 추천 사진을 보다 보면 깜짝 놀라곤 합니다. 사람과 짐승의 경계에서 말도 못 하고 눈만 껌뻑이던 때와 비교하면 참 많이 컸다는 걸 실감합니다. 이쯤 해서 아들 녀석한테 관찰되는 몇 가지 특징들과 성격 따위를 기록해두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요망한 기억력에 의존하면서 애를 키우다 보면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있으니까요.


1. 모범생 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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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내와 함께 분당에 있는 어린이 안전체험관에 다녀왔습니다. 최근에 아이가 책에서 본 지진과 화산활동에 꽂혀서 아내가 알아보고 간 곳이었습니다. 저는 카페에서 기다리고 아내와 아이만 지진체험을 하고 왔습니다. 체험을 다 마치고 나온 아내의 표정이 무척 뿌듯하더군요. 아내 말로는 아이가 무척 열심히 참여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학교 가면 진짜 잘 적응할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요. 아내는 아이에게서 자기 어렸을 때 모습이 보였다고 합니다.

모범생 기질은 아내의 피를 이어받은 것 같습니다. 저는 불량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학교나 선생님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성실한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모범생들보단 춤추고 운동 잘하고 웃긴 친구들에게 더 많은 호감을 느꼈고요. 제게 모범생은 따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의 학교생활에서 만났던 담임선생님들의 성함이 생각도 안납니다. 이런 제가 선생을 하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벌 달게 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내는 학교와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 칭찬과 사랑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모범생처럼 행동했다고 하더군요. 교사가 된 이유도 선생님을 좋아했기 때문이고요. 제 입장에서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아이가 반듯한 엄마의 유전자를 이어 받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기관 생활을 해야 할 운명이라면 열심히 하면서 사랑받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요.

2. 상관이라는 운명과 싫어싫어 병

상관이 뭔지 아시나요? 사주에서 말하는 상관은 관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풀어 말하면 권위를 무척 싫어한다는 말이지요. 저와 아이에게 상관이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사주를 별로 믿지는 않지만 아내가 재미 삼아 알려준 이 단어가 저와 너무 잘 어울려 잊히지가 않습니다. 아이도 저처럼 권위에 저항하는 모습이 종종 보입니다.

아이는 기관 생활을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모범생 기질이 있어서 일단 가면 잘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해야 된다는 의무감과 기관 생활의 답답함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습니다. 방학을 맞아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는 무척 행복해 보입니다. 짜증도 덜 내고 예쁜 말과 행동도 더 많이 합니다. "심심하지 않아? 어린이집 가고 싶어?"라고 물어보면 "난 심심한 게 좋아."라고 범상치 않은 대답합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에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해 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해서 훈련시킵니다. 그런데 요즘에 이놈이 "감사합니~", "고맙습니~", " ~해 주세~" 이런 식으로 끝에 말을 다 잘라먹습니다. 이상하게 말하고 혼자 씨익 웃는 걸 보면 본인만의 재미이자 장난인 것 같습니다. 정색하고 하나도 안 재미있다고 훈육을 하지만 고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애들은 원래 만 번은 말해야 한 가지 행동을 고친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제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이러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어쩌면 공통적인 현상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바뀌겠지요.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모든 서술어에 '안'을 갖다 붙이거나 싫다는 대답을 합니다.

"사랑해"

"안 사랑해"

"밥 먹고 낮잠 자자."

"낮잠 안 자자"

"빨리 씻자"

"싫어요"

어린이집에서 노래 부르기를 하는데 가사에 모두 '안'을 붙여 부르다 선생님께 혼난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희한한 건 말은 저렇게 해도 시키는 건 다 하긴 합니다. 해야 하는 건 아는 데 시키는 그대로 하기 싫은 상관의 피가 아이의 언어를 고장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는 왜 저러냐며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상관으로 평생을 살아온 저는 매우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힘내라 아들아."


3. 모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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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아이와 함께 자기 전에 명상이나 요가를 하곤 합니다.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보내려는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아이가 명상과 요가를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자는 것보다 요가하는 게 더 나은지 꽤 집중하더니 기대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줬습니다. 진지하게 앙상한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자세를 잡는 모습에 빵 터졌습니다. 앞으로 꾸준히 하면 꽤 괜찮은 성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아이가 밥이 올라간 숟가락을 입에 넣고 숟가락 빼는 대신 고개를 돌려 밥만 쏙 뽑아 먹더군요. 희한하게 밥 먹네라고 생각하는 찰나, 아이가 "아빠 이렇게 밥 먹잖아"라고 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아내가 갑자기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맞아, 오빠 맛있으면 저렇게 먹어"라고 말하면서요. 저도 모르는 제 습관을 아이 덕분에 나이 40이 가까이 돼서 알게 됐습니다.

본래 아이들은 뭐든 참 잘 따라 합니다. 제 아이는 유독 따라 하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모방을 잘하는 건 관찰을 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눈치채지 못한 찰나의 순간에도 아이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관찰하고 그대로 흉내 냅니다. 사소한 제 행동거지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가끔 제가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했던 잘못된 행동들을 아이가 그대로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내의 표정이 굳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뒷짐을 지고 눈을 내리까는 반성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아이를 저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키우려면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4. 멸치 유전자를 소유한 대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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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선천적으로 멸치 몸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에 등장했을 때 모든 여학생들의 주목과 환호를 받았었죠. 지금도 웬만한 여성들보다 가는 손목과 발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녀린 몸을 제 아이에게 고스란히 물려줬습니다. 아내는 좋아합니다. 야리야리한 아이의 몸을 볼 때마다 너무 예쁘다고 합니다. 옷발이 잘 받는다는 둥, 튼튼한 다리가 싫다는 둥 희한한 소리를 하면서요.

가녀린 몸은 옷걸이로는 좋으나 거친 수컷들의 세계에서는 딱히 좋을 게 없습니다. 면봉 실루엣을 가졌던 저는 연고도 없던 험악한 동네로 고등학교를 진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수염 거뭇한 들개들의 먹잇감이 되곤 했었죠. 학교폭력을 당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딱히 기를 펴지도 못했고 짓궂은 장난에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니 걱정하진 마세요.) 오래전 사바나 초원에서 제가 태어났다면 가장 먼저 동물들에게 잡아먹혔을 것입니다. 자연계에서 생존할 수 없는 유전자이지요.

운동을 남보다 두 배 더 해야 간신히 비슷한 근육량을 얻을 수 있는 불행한 유전자입니다. 데드리프트를 130kg까지 치고 있지만 종아리는 여전히 매끈합니다. 제 아이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니 답답합니다. 아내는 멸치 스쿨 차려서 아들을 열심히 가르치라고 합니다. 누구보다 아들의 몸을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아이가 멸치 스쿨을 잘 졸업해서 테토남으로 당당히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아이의 식성은 아주 좋습니다. 입도 짧고 편식도 많이 했던 저와는 전혀 다르죠. 새로운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는지라 만 3세에 광어회를 섭렵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잘 먹으니 저보다는 훨씬 좋은 피지컬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5. Born to be 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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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저를 만나시는 많은 분들이 저를 점잖은 사람으로 보곤 합니다. 맞는 말이긴 하죠. 내성적인 성격이라 밖에선 낯도 많이 가리고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는 편도 아니니까요. 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전 집에서는 완전 광대입니다. 기괴한 짓도 많이 하고 장난도 심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자라서인지 아이도 참 흥이 많고 장난도 잘 칩니다. 매번 저희 부부 앞에서 희한한 행동을 하고 저희 반응을 기다립니다. 저희가 웃을 때까지 행위의 강도를 높이는 집요함도 있습니다. 요즘은 장난이 너무 심해 훈육을 하지만 저 넘쳐나는 끼를 어찌 막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분위기는 파악하면서 장난칠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행히 저처럼 밖에서는 얌전한 척 시치미를 뚝 뗍니다. 피는 못 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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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사물놀이입니다. 뽀로로도 아이의 사물놀이 사랑을 방해하진 못합니다. 집안의 온간 물건은 북과 꽹과리가 됩니다. 기분이 좋으면 한바탕 공연이 벌어집니다. 최근에 친구 녀석이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아기를 데리고 저희 집에 놀러 왔습니다. 제 아이는 동생에게 꽹과리, 북, 장구, 징, 나팔 연주를 순서대로 보여주더군요. 제 친구 놈도 기가 찬 표정으로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한결같이 사물놀이만 사랑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금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6. 베스트 프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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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베스트 프렌드가 생겼습니다. 누구랑 결혼할 거냐고 물으면 이젠 엄마, 아빠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죠. 친구가 얼마나 좋은지 친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혼자 있을 땐 나름 주도적이고 창의적으로 놀지만 친구만 나타나면 모든 주도권을 친구에게 넘겨줍니다. 그 덕분에 아이는 밸런스 자전거도 단 하루 만에 마스터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타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혼자 이를 닦는다는 말에 이를 혼자 닦겠다고 떼를 쓴 적도 있습니다. 금세 다시 저에게 칫솔을 양보해 줬지만요. 건전한 경쟁관계에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다만 좋지 않은 것도 그대로 다 따라 한다는 점은 좀 아쉽긴 합니다. 그런데 어찌 좋은 것만 얻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득이 있으면 실이 있는 법이지요. 어쨌든 지금처럼 친구와 행복한 날들을 잘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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