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내가 둘째를 임신했습니다.

by 삽질

아내가 둘째를 임신했습니다. 얼마 전 밥을 먹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달려 나온 아내가 놀란 얼굴로 "오빠 나 임신했다!"라고 외쳤습니다. 희미하지만 임신 테스터에는 두 줄이 분명히 그려져 있었습니다. 작년 말에 둘째를 계류유산으로 보내주고 무려 8개월이라는 대장정 끝에 다시 둘째를 얻게 됐습니다. 유산하고 아내의 몸이 회복되고 나서부터 매달 시도를 했으니 정확히는 6개월 정도를 노력한 셈입니다. 생각보다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올해까지만 노력해 보고 안 되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하나만 잘 키우자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운이 무척 좋았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내년 4월에 출산할 예정입니다. 따뜻한 봄날에 둘째를 안아 볼 수 있겠군요.

아직 임신 극 초기이기 때문에 변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고 난 뒤에 모두에게 알릴 계획입니다. 아내나 저나 나이도 많고 이미 유산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습니다. 나중에 안정되면 글을 쓸까 했는데, 그냥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 일단 적고 봅니다. 손끝이 간질간질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둘째를 낳을지 여러 달을 고민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아내가 둘째를 갖고 싶다고 말을 했지만 저는 주저했습니다.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내가 행복하게 키워줄 수 있을까? 아이의 허락 없이 이 험한 세상으로 태어나게 한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내 아이가 컸을 때 경제적으로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저도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아내가 죽은 뒤에 이 세상에 혼자 남아있을 첫째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가까이 있지도, 자주 연락하지도 않는 제 누나의 존재가 주는 따뜻함과 든든함을 제 첫째 아이에게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에게 물질적으로 줄 수 있는 건 많이 없겠지만 그래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헬 조선이니 세계 최저 출산 국가니 해도 누군가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행복해지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도 행복하게 잘 살아갈 길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생긴 덕분에 제주도로 내려가는 아내와 제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아내는 제주도로 전출을 신청할 필요 없이 육아휴직을 쓰면 되기 때문이죠. 게다가 아내가 육아휴직 한 덕분에 육아휴직 수당도 나오고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나오는 정부 지원금이면 일 년 정도는 일하지 않아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실업급여를 신청해서 조금은 여유롭게 새로운 직장을 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복지가 꽤 괜찮은 나라가 아닌가 싶습니다.

첫째에게 동생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남자 동생이 좋냐, 여자 동생이 좋냐는 말에 여자 동생이 좋다고 대답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미래가 닥쳐올지 알고나 대답하는 걸까요? 첫째에게 동생의 탄생은 아마도 태어난 이래 가장 큰 충격인 사건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충격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아내와 저는 나름 머리를 썼습니다. 첫째, 저, 아내가 한 팀이 되는 것이죠. 새로 태어난 둘째는 우리 셋이 도와주고 키워야 하는 불쌍한 존재로 상황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첫째에게 부모의 권위를 나눠주고 어깨에 힘 좀 넣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째 편이 되어준다면 경쟁심이나 질투심이보다는 책임감과 사랑을 더 많이 느끼지 않을까요? 아무쪼록 첫째가 둘째를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삶이 참 많이 변했고 그만큼 저도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다행히 좋은 방향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둘째가 생긴 지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변화가 느껴집니다. 저와 아내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들을 도전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다음 장에서 새롭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다들 인생 2막이라는 말을 은퇴할 즘 쓰지만 저희 가족은 지금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무척 설레고 기대됩니다. 무엇보다 둘째가 무사히 우리 곁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다니지도 않고 종교도 없지만 간절히 빌어봅니다.

keyword
삽질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