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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만나기 쉽지 않네요.

by 삽질


아내는 병원에서 초음파로 임신을 확인 한 이후에도 임신 테스트기를 한 뭉치 사놓고 이틀에 한 번씩은 체크를 해봅니다. 표시줄이 점점 선명해지는 걸 확인하면서 임신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다행히 선은 눈에 띄게 선명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변을 볼 때 약간의 피가 나온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Chat gpt에 물어보니 착상 혈일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아내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가볍게 위로를 했습니다. 지난번 둘째를 임신했을 때와는 다르게 모든 게 명백해 보였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11월에 둘째를 유산했을 땐 애매한 것들 투성이었습니다. 임신 테스트기에는 분명 두 줄이 생겼지만 선 하나가 굉장히 희미했고 시간이 지나도 뚜렷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봐도 의사선생님이 간신히 아기집을 찾고 나선, 이게 맞는 것 같다고 애매한 답을 주셨고요. 그리고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았을 땐 도무지 아기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엔 아내는 유산 유도 주사를 맞고 애매했던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몸밖으로 지워내야 했습니다.


이틀 전, 아내 그리고 아이와 함께 다시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첫아이를 받아주셨던 의사선생님께 예약을 하고 삼 년 반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저희를 기억하진 못하시겠지만 오랜만에 뵈니 반갑더군요. 의사선생님이 첫째에게 "동생이 남자야 여자야?"라고 물으니 "아직 안 만나봐서 몰라요"라는 대답을 돌려줬습니다. 아이의 똑 부러지는 답변에 분위기가 가벼워집니다. 초음파 실로 들어오라고 제게 안내를 해주고 함께 커튼 뒤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모니터를 봤습니다. 봐도 제가 뭘 알겠습니까. 멍하니 보고 있는데 선생님 목소리가 밝지 않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합니다. 중얼거리듯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피고임이 있다는 말을 하십니다. 좋지 않다는 식의 뉘앙스가 짙게 묻어 있습니다. 초음파 촬영을 마치고 다시 커튼 뒤 밝은 곳으로 나왔습니다.


별말씀 없이 의자로 돌아온 의사선생님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계십니다. 잠시 뒤에 아내가 옷을 입고 나오니 그제야 입을 여셨습니다.


"자궁안에 피가 좀 고여 있어요. 혹시 소변에도 피가 나오나요?

"네, 조금씩 나올 때가 있어요."

"그렇죠?"


무거운 침묵에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근데, 피는 왜 나오는 건가요?"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아기가 자궁벽에 착상을 하려고 할 때, 자궁은 반사적으로 밀어내려고 해요. 자기한테 뭔가가 붙으려고 하니까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출혈이 생기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는 아기가 좋지 않을 때 그렇고요. "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유산할 경우에 피가 생긴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였습니다.


"혹시 지난번 초음파 사진 갖고 있나요?"

"네, 핸드폰에 찍어둔 게 있어요. 잠시만요."


한참 동안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여 아내가 사진을 선생님께 보여드렸습니다.


"아... 아이가 그래도 일주일 동안 많이 컸네요. 어쨌든 난황도 확인이 됐으니깐, 일주일 뒤에 다시 확인해 보도록 해요. 우선 자궁수축 방지제 처방해 드릴게요. 자궁 수축을 줄여줘서 아이가 잘 착상할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 사용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


어두워진 표정으로 아내와 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정말 쉽지 않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것저것 선생님께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만뒀습니다. 시간이 지나야만 모든 게 명확해질 테고 지금 호들갑 떤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순간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만약에 유산이 된다면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같은 것도 느껴졌습니다. 유산하고 몸이 회복되고 다시 임신 시도를 하려면 너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예정대로라면 내년 4월, 꽃 피는 봄에 태어난 아이와 함께 제주도에 내려가는 계획을 세웠는데 모든 게 엉망이 될 것 같은 불안함도 느껴졌습니다. 아내는 또 얼마나 큰 실망을 할까 걱정도 됐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빠져나왔습니다.


저와는 달리 아내는 충격이 그렇게 커 보이진 않습니다. 괜찮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소변에서 피가 보이고 나서 불안한 마음에 조사를 꽤 해본 모양입니다. 착상혈은 종종 있는 일이고 임신 테스트기에 보이는 호르몬 수치가 올라가는 걸 보면서 어쨌든 정상적으로 임신이 진행되고 있다고 본인은 나름의 결론을 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의 진단에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할까 걱정이 됐는데,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안했습니다. 피가 보인다고 했을 때 저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든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가벼운 위로만 툭 던졌으니까요. 아내만 혼자 인터넷을 뒤지고 chat gpt한테 물어보며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고요.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저를 반성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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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금요일에 다시 병원에 갑니다. 부디 자궁에 피고임도 사라지고 아이가 잘 자라고 있길 간절히 빕니다. 아내가 스스로를 안심시켰듯이 다행히 저도 안심이 좀 됩니다. 그래도 우리의 인생은 항상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한 만큼 경계를 늦추진 말아야겠습니다. 혹시나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둘째가 무사히 태어나는 일은 정말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곁에 있는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이니까요.


참, 둘째 녀석 보기 어렵네요. 왜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는지 나중에 물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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