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의 역설

by 삽질

지난 주말에 갔던 독립 기념관에서 봤던 수많은 열사와 의사들의 생애는 생각보다 무척 짧았습니다.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처럼 큰 어른으로 여겨지는 분들이 순국하신 나이는 지금 저보다도 꽤 어립니다. 30대 초반에 돌아가셨더군요. 불꽃처럼 살다 가신 위인들과 비교하니 제가 살아온 40여 년의 시간이 마치 늘어진 테이프처럼 힘없고 헛헛하단 느낌이 듭니다. 앞으로 우리의 수명은 100살을 거뜬히 넘길 거라던데, 제게 남은 60여 년의 세월은 얼마나 지리할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수명이 길어진 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몸은 원래 이렇게 오래 살도록 설계된 게 아닐 텐데, 뭔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원래대로 우리가 적당히 살다가 떠난다면, 생각보다 많은 문제들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도, 사회적인 문제도 말입니다. 자연스러움을 미학으로 여기는 저는 생명 연장을 위한 수많은 의학적, 과학적 시도들이 기괴하고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몸은 여전히 너무 건강하지만 뇌는 죽어가는 노인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거창하게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간이 유한하고, 주어진 시간이 짧아지면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감도는 더 높아집니다. 그래서 시간이 촉박할수록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중요한 것을 우선 선별하면 시간을 알뜰히, 알차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시간이 여유로울수록 우리는 시간을 업신여기고 나태하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많을 때 공부를 미리 하거나 업무를 열심히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도 큰 탈이 나지 않으니까요. 죽음을 눈앞에서 경험했던 사람들,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오늘을 대하는 경건한 자세는 제가 감히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노력으로도 넘을 수 없는 선은 존재합니다.


누구나 오늘을 제대로 사는 것과 기약할 수 없는 먼 미래를 준비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행복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길어진 수명 때문에 균형을 맞추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선물 같은 오늘을 먼지처럼 날려버리며 살곤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오래 살 거라고 여기는 당연한 가정은 애초에 틀렸는지도 모릅니다. 별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희귀한 사건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생각보다 종종 일어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짧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다를 거라는 마음가짐은 삶을 만만하게 보는 오만한 태도입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납니다.

지금과 미래 사이의 균형추를 조금 앞당겨 보면 어떨까요? 제 수명이 100년이 아니라 60년이라고 가정한다면 이제 겨우 20여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시험이 코앞에 닥친 듯한 느낌입니다. 미래 준비에 힘을 조금 빼고, 오늘을 사는 데 더 진심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누리는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게 됩니다. 하루하루에 열정을 쏟으며 살았던 위인들처럼 살긴 어렵겠지만 그분들의 마음가짐 갖고 산다면 후회는 덜 남을 것 같습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됐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keyword
삽질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