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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조향의 언어적 실험의 향방(3)


   3.  

   

   조향은 「‘데뻬이즈망’의 미학」이라는 글을 통해 「바다의 層階」를 분석하고 자신의 시작에 대해 설명한다. 앞서 밝힌 것처럼 그에게는 새로운 감각을 지닌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현대시에서는 말의 의미보다 “‘말’의 구성에 의하여 특수한 음향(운률이 아니다)이라든가, 예기하지 않았던 ‘이마쥬’, 혹은 활자 配置에서 오는 視覺的인 효과 등, ‘말의 예술’로서의 機能의 면에다가 중점”(「‘데뻬이즈망’의 미학」, 『韓國戰後問題詩集』, 신구문화사, 1961(『韓國現代詩史資料大系』, 동서문화사, 1987), 417쪽.)을 두어야 함을 강조했다. 「바다의 層階」에서도 이를 즐겨 사용했는데, “폰폰따리아”’, “마주르카”, “디이젤-엔진”, “들국화”(12쪽)와 같이 일상적인 의미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일종의 콜라주 기법으로 시를 구성한 것이 한 예이다. 그는 시를 쓸 때에 상식이 된 관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이나 규칙에 위반되는 자리에 예상치 못한 말들을 배치하여 얻게 되는 효과를 중시했다. 이때 그것을 어떻게 배치하고 시를 구성하는가가 현대시의 미학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 된다. 그가 시를 창작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힌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유연상이란 방법은 예술가에겐 없지 못할 것으로 되어 있다. 자유연상 상태란 곧 自我(ego), 超自我(super-ego)의 간섭이 없거나 극히 약해져서 想像의 自由가 保障되는 일종의 放心 상태를 말한다. 〈벨그송〉(Bergson)의 「純粹持續」의 상태와 흡사하다. 이러한 방심 상태에서는 無意識 혹은 前意識의 세계, 곧 深層心理面에 잠겨 있던 모든 것들이 순서도 없이 곡두(幻影)처럼 의식 면에 떠올랐다간 가뭇없어지고 스러져 버리곤 한다. 그런 現象을 옛날 사람들은 靈感(inspiration)이라고 불렀다. 나의 詩債帖에는 이러한 순간적인 〈이마쥬〉의 破片들이 얼마든지 速記되어 있다. 나의 〈에스키스〉(esquisse)다. 그것을, 적당한 시가에 〈바리아숑〉(variation)을 주어 가면서 〈몽따쥬〉(montage)를 하면 한 편의 詩가 되곤 한다. 나는 詩를 이렇게 쓴다. 詩人으로서의 재간은 이 〈몽따쥬〉하는 솜씨에 결정적인 것이 있다. (「‘데뻬이즈망’의 미학」, 앞의 책, 419쪽. )

    

   그는 큐비즘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인 브라크를 자주 인용하면서 의미의 무용함을 역설한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이 존재할 때에 내용에 편향되어 있는 자들은 결코 현대시의 미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맥락과도 동일하다. “아름다운 렛텔이 붙은 통조림 통이 아직 부엌에 있는 동안은 그 의미는 지니고 있으나, 일단 쓰레기 통에 내버려져서 그 의미와 효용성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현대시론(초)」, 앞의 책, 146쪽.) 브라크의 이 한 마디로 확인가능하듯이, 조향은 물건이 일상 세계에서 제자리를 점유하는 상태에서는 결코 예술적 세계가 탄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조향에게는 자유연상에 의해 상상되거나 순간적으로 떠오른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결합이 중요했다. 그것은 로트레아몽(이시도르 뒤카스)의 『말도로르의 노래』의 “해부대 위의 미싱과 박쥐우산의 해후처럼 아름답다”라는 구절과도 관련이 깊다. 더욱이 시인이 어떻게 이미지를 배치하느냐에 따라 시적 성취 여부가 결정된다. 조향은 의미의 세계가 완전히 포기된 채로 오브제들이 콜라주되어 있는 시들을 많이 발표했다. 대부분의 시들은 이처럼 일반적인 문법 체계를 벗어나는 오브제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느 날의 MENU」(1958)가 그 특징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詩集을 안고. 「빠아」〈지중해〉의 辭表. 거만한 高架線. 과부 구락부. 「메가폰」. 걸어가는 헌병 Mr. Lewis. Poker. 검문소의 〈몽코코·크림〉. 聖敎堂에서 街娼婦人과 卒業證明書. I’d like some air. 노오란 웃음의. 소녀소녀소녀소녀소녀. die blue blume.

防風林 넘에. 누워 있는 파아랗지 않은. 바다. 검은 변. darkness at noon. 제2국민병제2국민병제2국민병제2국민병. 무말랭이. 글쎄요. 소년 matroos의. 「아달린」과. 기차를 타고 온 민의대표들의 밀짚 모자와. 助淫文學家 「무슈」〈김〉. 買辨階級의 疾走.

西北航空路에서. 無面渡江東. 곤봉정치가의 연설에 관하여. 검은 안경. 화랑부대 ○○고지 탈환. vol de nuit. 〈을지문덕〉의 미소. 

〈모나리자〉는 「나이론」 양말을 벗고. 「파이프. 올간」. 국제 전화국에서. AGAMEMNON. 땃벌 떼는. 곡마단 단장의. 새까만 밤밤밤밤. 「발콘」에서 심각한 풍속을 지니는 議長들. 〈모택동〉의 피리 소리. 파아란 맹렬한 밤. 그럼요. 〈카사브랑카〉. 假裝舞蹈會. 〈카밍스〉씨의 文法要綱. 〈아라스카〉의 基地에서. 助敎授의 연애 사건을 의하여. 超人鐘. motus! 여기는 喪家이랍니다. 황혼. 네! 그렇거세요. 아아멘!


―「어느 날의 MENU」(1958) 전문, 110쪽.     

 

   위의 시는 하루 동안 보거나 상상한 이미지의 파편들이 메뉴판처럼 나열된 형태로 콜라주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이 시는 ‘걸어가는 헌병 Mr. Lewis Poker’, ‘검문소의 〈몽코코·크림〉’, ‘〈모나리자〉는 「나이론」 양말을 벗고’와 같이 연관성이 없는 이질적인 단어들을 병치해 연쇄적으로 나열함으로써 데페이즈 미학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녀’, ‘제2국민병’, ‘밤’이라는 말은 네다섯번을 반복해서 배치해 리듬, 즉 음향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각각의 파편들이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스스로 밝혔듯이 이들 오브제를 선택해서 어떻게 배치하는가 하는 데에는 시인의 의도가 개입되기 때문에 아무런 규칙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래 언어가 가지고 있던 의미 그대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시 전체가 파편화된 언어로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국내외 정세나 자신의 예술적 관심사, 성적인 혼란상을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 기호들로 배열해 두었을 뿐이다. ‘메가폰’, ‘헌병’, ‘검문소’, ‘곤봉정치가’ 등의 단어들은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드러내주며, 그리스신화, 국제적 정치 상황으로까지 연결된다. 이들 정황은 ‘假裝舞蹈會’라는 말로 압축되어 있다. 더불어 ‘聖敎堂’, ‘街娼婦人’, ‘助敎授의 연애 사건’ 등은 한자어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규정짓고 있지만 그것이 특정 의미로 제한되지 않는 하나의 기호라 한다면, 이들은 각각 ‘性交’, ‘歌唱’, ‘娼婦’, ‘趙敎授(조향 자신)’ 등으로도 바꿔 읽힐 수 있다. 성스러움과 세속의 시대상황, 그리고 성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교차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용한 한자, 영어, 불어 등은 각각이 오브제로 기능하면서도 원래의 의미마저 교란시키면서 재배치하는 하이브리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vol de nuit’은 고지를 탈환하는 작전으로도, 생텍쥐베리의 소설 『야간비행』으로도 읽힐 수 있으며, 영화 〈카사블랑카〉의 로맨스 역시 이들 오브제와 결합가능하다. 그는 자신의 지적 자산들을 활용해 자유연상기법으로 언어화하여 배치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의 변주를 통해 의미 중심의 언어 체계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는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상상, 내면과 외면이 서로 교차하면서 ‘喪家’와 ‘황혼’과도 같은 전후 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쾌락 원칙’이란 주로 현대의 심리학(정신분석학)에서 얻은 원칙으로서 사실은 시간성이 농후한 원칙이다. 끝없이 유동하는 의식의 세계라는 시간성을 이성에 의한 간섭이나 정리 작업이 없는 단속상태 그대로의 기록―내적독백―자동기술법으로서 표현했을 때, 거기엔 절로, 전혀 먼 거리에 놓여 있는 현실들이 서로 인접하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병존할 수 없는 것끼리가 시인의 힘으로 동시동존(同時同存)하게 된다. 이 근방에서 ‘현대시’에 있어서의 ‘오브제’성이 빚어지는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에 돌발적인 ‘이마아쥬’의 세계가 폭발한다. 말하자면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상대성)의 ‘벨트’에 점점이 수놓이는, 찍혀가는 ‘이마아쥬’(공간성‧절대성)의 세계, 사차원의 세계! 초현실주의 ‘데뻬이즈망(dépaysement)’의 미학. (「현대시론(초)」, 앞의 책, 141쪽.) 


   그것은 시인에 의해 언어가 원래의 위치와는 다른 곳에 놓이게 되는 것이며, 이를 두고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이라 칭한다. “거기엔 아무런 현실적인, 日常的인 意味面의 연관성이 전연 없는, 동떨어진 事物끼리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이와 같이 事物의 존재의 현실적인, 合理的인 관계를 剝奪해버리고,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를 맺아 주는 것을 〈데뻬이즈망〉(depaysement)이라고 한다. 그 움직씨(動詞) 〈데뻬이제〉(depayser)는 「나라」 (혹은 「환경」‧「습관」)를 바꾼다는 뜻이다.”(「‘데뻬이즈망’의 미학」, 앞의 책, 417쪽.) 자리바꿈을 통해 일상적 문법을 파괴하는 이와 같은 방법론은 돌발적인 이미지의 폭발과 오브제들로 가능해진다. 또한 그것은 시인이 서로 인접할 수 없는 것들을 병존시킴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조향이 시작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진행해온 작업은 사실 이 데페이즈망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전위적인 언어 실험을 통해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을 탈피하고자 했으며, 그 방법론으로 활용한 것이 초현실주의적인 기법들이었다.     

   

초현실주의도 이제 약 50년이라는 나이를 먹었다. 포기되었던 ‘의미의 세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데리고 와야 한다. 그것은 옛날의 시로 돌아가라는 신호가 아니고, ‘데뻬이즈망의 미학’에다 현대의 검은 비극의 상황을 흘려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현대의 암흑! 이것이 나의 길인 네오 슈르레알리슴이다. (「현대시론(초)」, 앞의 책, 148쪽.)     


   그는 네오 쉬르리얼리즘으로까지 나아간다. 초현실주의와는 달리 이는 현대의 암흑을 시 속에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1950~60년대에 발표된 조향의 시들에서도 검은색 계열의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암흑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라는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누엿누엿 스러져 가는 時間이었다/실없는 臺詞 더미 위에/무수한 事件들의 무덤이 있었다/아 1951年의 蒼白한 悔恨이여!”(「最後의 密會」, 119쪽), “오/매담/코크리코!/찦車/GMC/大領들의 으슥한 對話./拳銃의 沙汰/大學生의 데모./검은 바람의 소리가/휘익!/돌아가 버리는 거리 모퉁이/비둘기는/未來의 序章에서/보라빛 군소리를 읽는데”(「Normandy 航路 前夜」, 140쪽), “彈皮. 頭蓋骨. 또 외삼촌의 코가 떨어져 있고./귀한 눈알들이 〈朝鮮〉의 하늘 우러르며 누워 있다. 피. 주검 겨레.”(「그 날의 蜃氣樓」, 78쪽)와 같은 구절만 보더라도 이는 쉽게 확인된다. 피폐해진 전후라는 시대 상황과 완벽하게 단절될 수는 없었던 그는 전쟁에 관련된 오브제들을 하나의 파편화된 이미지로 시에 삽입하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또 다른 새로움을 창조하고자 했다. 

   “검은 것과 회색의 아롱점이 찍혀 있는 무대 위에서 우리의 DRAMA는 끝없이 되풀이되어 가고.”(「왼편에서 나타난 灰色의 사나이」, 108쪽) 우리는 자유를 압수당한 채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아직도 이렇게 살아 있다.” 「어느 날의 MENU」에서 문명의 ‘황혼’, ‘喪家’로 비유된 전후의 상황은 ‘지옥’이나 ‘폐허’, 막다른 ‘골목길’ 등으로 변주된다. 그의 시편에서 모퉁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화자의 몸부림에 가깝다. “하 아무도 날 따라와 주는 기척이 없기에 돌아다봤더니 내 뒤에는 검은 壁 壁壁壁壁壁壁 되돌아 나갈 바늘구멍 하나도 없다. 앞으로만 자꾸 가야 하는 나”(「검은 DRAMA」, 111쪽)는 앞만 보고 이곳을 벗어나려 하지만 주위는 모두 벽으로 가로막혀 탈출이 불가능하다.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벗어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형상화하는 전쟁 이후의 참혹한 이미지들은 죽음으로 가득차 있다. 일정한 흐름이 유지되지는 않으나 분해되고 조립된 이미지들을 통해 이 시기 조향의 시에는 대체적으로 죽음의 정조가 깊이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쎄그림자야바루검은것이자꾸만죽음은언제나/우리앞에그림강아지처럼아무렇지도않게놀고있는/거야시시각각으로아무렇게나동댕이쳐진오리모가지/가가지가모리오”(「S字 모양한 마음의 空洞에」, 97-98쪽) 띄어쓰기를 무시한 채  작성되고, 글자의 배열 순서가 뒤바뀌긴 했어도 검은 죽음이 나뒹구는 이 세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고, 송장, 검은 그림자, 죽음이 각 연마다 배치되어 있는 「綠色 椅子가 앉아 있는 ‘베란다’에서」의 마지막 연에서 “삶의 뒤란에서 죽음들은 하아얀 수의를 입고 놀고는 있다”(94쪽)는 표현을 통해 시적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지구라는 단어를 자주 등장시키면서 한반도적인 특수한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새로운 의미의 세계”(「현대시론(초)」, 앞의 책, 149쪽.)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추기도 한다. 그러나 새까맣게 물든 전쟁의 자장의 벗어날 수는 없다. “地球―이 허울좋은 强制收容所에서.”(「Salomé의 달밤」, 89쪽)라는 싯구는 화자가 맞닥뜨린 절망적인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손을 번쩍 들면

내 앞에 와서 쌔근거리며 개쁜히 정지하는 <크라이스라>. 길들은 사냥개.     


「빽·미러」 안에다 창백한 내 표정을 映像하며 

주검의 거릴 내닫는다. 나는 약간 흔들린다.     

 

죽어 쓰러진 엄마 젖무덤 파고드는 갓난애.

버려진 軍靴짝. 

피 묻은 「까아제」.

휘어진 鐵筋.

구르는 頭蓋骨.

부서진 時計塔.

전쟁이 쪼그리고 앉았던 廣場에는 누더기 주검들이.

彈丸 자국 송송한 郊外의 兵舍.

줄 지어 絡繹한 제웅의 무리.

참 落寞한 것.      


유리창 바깥엔 돌아가는 地球儀.

옛날의 옛날의 나의 <무란·루쥬>.

그 곁엔 찢어진 童畵 한 장 팔락이고.

童畵 가운데서 넌지시 砲身이 회전한다.     

 

내 가슴을 시꺼멓게 겨냥해 온다. 

이따금씩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리고 살갗엔 또야기도돋아나고.

「레스링」처럼 씩씩하던 都市에는 이제.

넘어져 가는 企業들의 지붕 위를

까마귀만 맴을 돌고.      


지친 思想의 「애드·바룽」이 히죽이 걸려 있는 붉은 닥세리.

타다 남은 쇠층층계 황토빛 하늘을 괴고 섰는 文明의 폐허를 지나.

천둥·비바람 차창에 요란한 曠野로. 

먹빛 抵抗이 치렁치렁 가로놓인다. 

허줏굿 소리 자꾸만 들려 오는 여기. 

아직도 運河의 언덕에선 모두들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당아씨, 어떻거고 싶지?>

“She answered: I would die.”

<나는 죽고만 싶단다>     


내일을 잃은 地球엔 이윽고 까아만

이 나린다.


―「文明의 荒蕪地」(1957) 전문, 90-91쪽.      


   파국적인 상황은 「文明의 荒蕪地」에서도 드러난다. 이 시의 제목과 내용은 엘리엇의 『황무지』를 연상시킨다. 화자는 달리는 차 속에서 죽음의 거리를 응시하고 있다. 3연에서 나열한 오브제들인 ‘軍靴’, ‘피 묻은 「까아제」’, ‘頭蓋骨’, ‘주검’은 폐허가 된 전후의 모습 그대로다. 전쟁의 비극은 죽어서 쓰러진 엄마의 젖무덤을 파고드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극대화된다. 전후의 피폐한 거리에는 삶과 죽음이 나뒹굴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것은 전쟁의 이미지들을 배열해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화자의 사유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따라서 데페이즈망이라는 방법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차 안에서 전후의 현실을 관망하고 있다는 화자의 위치 설정 자체가 당대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일을 잃은 地球엔 이윽고 까아만/幕/이 나린다.” 차 안, 그리고 그 옛날의 물랑루즈를 회상하는 곳에서 전쟁의 상흔은 그저 하나의 오브제로서만 기능할 수밖에 없다. 화자의 이러한 인식은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하거나 이에 직면하는 것을 유예시킬 뿐이다. “끊임 없이 回想의 時制가 맴을 도는 여기. 綠色의 地層에서. 化石이 되어 버린 나는 아아라한 古代처럼 잠자고 있다. 있어야 한다. 나는 영원을 산다.”(「綠色의 地層」, 100쪽) 화석이 된 ‘나’가 잠든 채로 불멸한다는 화자의 인식은 현실과는 무관한 관념의 세계로 빠져 들어갈 위험성을 동반한다. 오브제들로 채워진 형식적인 실험은 지성의 금자탑을 쌓으려는 수사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화자의 현실로 체화되지 못한 난해한 말들만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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