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순주 Apr 09. 2023

조향의 언어적 실험의 향방(4)


   4.   

   

새까만 밤의 장막에다 권총을 쏘아 주면 동그란 구멍이 팡 뚫어진다. 

(…)

우리는 CADAVRE EXQUIS를 안고 함성을 울리자! (「일요일의 이야기: 선언 같은 것」, 《日曜文學》 서문, 1963, 『전집2』, 62쪽.)    


   ‘선언 같은 것’이라는 부제가 달린 위의 글과 같이 조향 시에서는 권총과 동그란 구멍이 자주 등장한다. 권총이 전쟁, 나아가 기계 문명의 상징으로 사용된 오브제라면, 그로 인해 생긴 구멍은 전쟁의 상흔이 가져온 결여 상태를 나타낸다. 「EPISODE」에서도 소년이 쏜 총에 맞은 소녀의 손바닥에 동그란 구멍이 생기고, 이 구멍으로 소녀가 바다를 내다보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러나 권총이 초래하는 고통 혹은 공포가 이들 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총질은 역시 총질이어서 그 결과로 일종의 상처가 생겼고 소녀는 자신에게 입혀진 이 상처의 형식에 따라 세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여느 세상보다 더 신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총 구멍의 형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진정한 질적 변화를 초래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시야를 제한하여 넓게 보던 것을 더 좁게 보게 할 뿐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작고 “똥그란” 구멍이 그의 시의 미래를 벌써 결정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겠다.”(황현산, 「趙鄕의 하이브리드적 모험」, 2017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시대의 폭력과 문학인의 길”(2017년 4월 27일,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세미나실) 심포지엄 발표문, 28쪽.) 마찬가지로 밤의 장막에 구멍이 뚫린 뒤 이들은 선언 같은 것을 외치는데, 그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카다브르 엑스키라 명명한 일종의 이어그리기 기법에의 추구에 다름 아니다. 예술적 선언을 외치는 장면에 불과한 이 상황에 현실의 괴로움이 끼어들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향은 1960년 이후에 동아대 문리대학장, 예총 부산지부 초대지부장, 일요문학회 대표 등을 지내다가 1973년에 〈초현실주의연구회〉 조직을 발족해 동인지 『雅屍體』 및 초현실주의문학예술 시리즈 『오브제』를 발간한다. 그 후로도 〈轉換〉 동인 활동을 하면서 신작들을 발표한다. 이 시기에 쓴 작품들 역시 놀이나 유희로 대체되어 극단적인 언어 실험의 형태로만 드러난다.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으로 표현했던 것들이 시각적 혹은 청각적 이미지로 변모한다. 이미 50년대에 「물구나무선 세모꼴의 抒情」(1959)이라는 시를 통해서 거꾸로 된 세모꼴을 형상화함으로써 형식적인 실험을 시도한 적도 있지만 70년대에는 음향시라는 직접적인 형태로 창작한다.   

     

고로바요카나코루기나야라야마니고니카카

로네그나마노니가로구다노사야마고고로니비

니바니노나노가니바고로비츠시기라메니카르

로사니가나사바로나크루가야니티치치코바

           (音響으로만 즐겨 주길 바란다)


―「H氏의 祝文」(1978) 전문, 38쪽.     


   시 끝부분에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시는 특별한 의미없이 음향으로만 즐겨야 한다. 의미는 철저하게 박탈당하고, 언어적 유희로서의 기표만 덩그러니 남는다. 이 말들을 소리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축문을 읊조리는 듯한 놀이가 될 수 있다. 굵은 글씨로 강조된 음만 떼어내 읽으면 “마그나카르타”라는 말이 만들어지는데, 이 말은 1215년 영국 대헌장의 의미를 내포한다기보다는 역시 일종의 주술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 시는 기의 없이 기표로만 존재하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다. 

   70년대 말 이후로는 「H氏의 祝文」 이외에도 「一回用辨證法 모퉁이에서」(1981)와 「운동학적 처녀성……」(1983)을 통해 각 행에 굵은 글씨들을 조합하면 또 다른 언어가 되는 형태의 실험들을 몇 차례 반복한다. 그것은 각각 “막힌하수구를뚫자”, “한오백년살자는데웬성화냐”로 조합될 뿐이다.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언어적 유희의 세계로 나아갔던 그였기에 이를 과잉되게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또한 「코스모스가 있는 층계」에서는 시행을 계단의 형상으로 이미지화하기도 한다. 이들 시편들을 통해 조향은 예술적 성취를 이룩하고자 했다. 말이 지닌 본래의 생생한 감각을 살리기 위해서는 표현 방법을 바꾸어야 하고, 이는 단순한 것에서 더욱 복잡한 단계로 이행해 가야한다고 주장했던 그에게 언어를 통한 실험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조향의 실험은 점차 의미없는 놀이로 변해감으로써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다. 

   자동화된 일상 언어에 대한 위반을 시도하는 시인들에게 시적인 언어를 창조하는 행위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조향은 그와 같은 반란을 꿈꾼 사람들의 계보를 따라가며 언어적 실험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 과도한 열망 때문에 결국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예술은 예술로서만 남게 되었다. 삶과 현실이 동반되지 않는 예술은 언어로 소비되거나 향유될 뿐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완고하게 구축할 뿐이다. 삶이 곧장 예술이 될 수도 또한 예술이 그 자체로 삶이지는 않지만 바흐친의 말처럼 이 둘은 책임을 매개로 상호 관계한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뿐만 아니라 각각이 갖는 과실과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들 둘 사이에 긴장 관계가 유지될 때라야만 시적 언어는 생생한 감각을 획득하고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따라서 예술과 삶의 관계를 어떻게 정초하느냐에 따라 예술이 예술 그 자체에 복무할 수도 또는 삶을 더 나은 방식으로 견인할 수도 있다. 조향의 시편들로 확인된 실험의 궤적을 통해 우리는 예술과 삶의 관계를 다시금 사유할 수 있으리라.  






이전 03화 조향의 언어적 실험의 향방(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