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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망선배에 올라 동행하기(1)

─고금란 소설의 행보를 따라가다


* 고금란 소설가와는 2015년 5월 2일,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의 고등골 자택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 만남을 통해 나눈 이야기를 직접 가져온 부분은 밑줄로 표기하였다. 작품 분석은 책으로 묶인 세 권의 소설집을 대상 텍스트로 삼았으며, 『바다표범은 왜 시추선으로 올라갔는가』(여성신문사, 1997), 『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다』(여성신문사, 2002),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여성신문사, 2012)가 그것이다. 본문에 인용할 때에는 출간 순서대로 1,2,3으로 해서 (번호:쪽수)로 표기하기로 한다.




   1. 작품과 만나기 전에      

   

   책을 통해 먼저 알게 된 사람과 직접 만남을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책으로부터 그려지는 이미지가 상상했던 것과 달라서 실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저자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책을 더욱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번 역시 그랬다. 책으로 먼저 접한 소설가를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눌까 하는 설렘과 긴장감을 가지고 언양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사실 상당한 나이차 덕분에 좀 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한 시간 쯤 걸려 도착한 터미널에서 마주한 소설가와의 만남은 그 선입견을 단번에 불식시켜 주었다. 집으로 이동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받으면서 나눈 이야기들은 그녀 소설 세계와도 닮아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전혀 다른 삶의 체험으로 변주되고 있었다. 현실에 부딪혀 가며 힘든 생활을 할 때도, 문학에 몰두할 때도, 영성(靈性) 공부를 할 때도, 잡기(雜技)에 능해 이것저것 다른 것에 관심을 둘 때도, 여전히 문학성이 지탱해 주는 삶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소설가의 문학 세계는 또 어떻게 변주되는 것일까. 좀 더 세밀한 고찰을 요하는 일이다. 삶의 내력에서부터 길어올린 경험의 소리와 연륜을 품은 활자들에 좀 더 주목해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은 “망선배”를 타고 항해하면서 그녀의 소설들과 만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등단작 「포구 사람들」에서 망선배는 천노인이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은율 금산포를 떠올리는 장치이다. 고기를 잡던 그물배를 칭하는 망선배는 어린 시절, 이미 사라져버린 “구시대의 유물”(1:13)이기에 타본 적은 없는 것이지만, 고향/꿈으로 그를 안내하는 유일한 연결고리이다. 과거의 잠재된 “기억 창고”에서 끄집어 올린 기억들과 조우하는 망선배의 거침없는 항해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 길에서 만나는 그녀의 문학 세계는 어떻게 조형되고 있는지 추적하기 위해, 함께 그 길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2. 방랑 속에서 조우한 새로운 삶의 가치      


   첫 번째 소설집 『바다표범은 왜 시추선으로 올라갔는가』는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정처 없이 떠도는 인물군을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소설 쓰기라는 항해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낡은 배를 안정적으로 조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굳은 결심으로 파고를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품지만, 세상은 그마저 쉬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간다. 포기하지 않는다. 소설을 향한 열정, 쉽지만은 않은 고통스러운 현실, 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뒤얽혀 다양한 양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첫 번째 소설집인 『바다표범은 왜 시추선으로 올라갔는가』이다. “문학이라는 노(櫓)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1:330)는 작가의 말은 이러한 상황들을 반추하는 자리에 그녀의 소설들이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해항은 그녀에게도, 그녀가 직조해낸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의미있는 방랑이다. 그녀의 노에 몸을 맡기고 배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자.

   배를 타고 표류하는 이들의 삶은 한 곳에 뿌리내리기 어렵기에 항시 위태롭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여대생 방북 사건의 배후 조직 책임자였던 장씨가 수사망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포구 사람들」) 뿐만 아니라 택시 운전을 하는 배씨(「그 여름날의 탈선」), 화물차 운전사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정만섭(「바람막이」),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로 막노동, 채소 장사, 화장지 장사를 마다하지 않는 문군(「그들의 행진Ⅱ」), 가세가 기울어 다방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미스 송(「바다표범은 왜 시추선으로 올라갔는가」), 용숙이를 찾아 십수 년 동안 전국을 유랑하고 있는 영감(「그림자와 빛」), 네팔을 떠나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라임(「겨울 강」), 이북에서 피난온 후 한실 마을에서 살다가 좀도둑으로 내몰려 쫓겨난 천억만의 가족(「어떤 귀향」) 등의 인물들은 모두 떠돌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의/타의로 인해 오랫동안 한 곳에 붙박여 살아갈 수 없으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그렇다면 이들이 방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물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태가 다채로운 것과 같이 그 이유 역시 다양하다. 그럼에도 공통점을 추려내 본다면 그것은 가족의 결핍, 고향의 상실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결핍이나 상실은 삶에 대한 허망함과 무기력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그녀 소설 속 인물들은 이를 껴안고 살아나간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삶은 고통스럽다. 「닻줄」에서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이 터한 삶의 거처를 철저히 외면해온 오빠가 등장한다. 다락방에 거처하면서,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나면서 가족으로부터 의식적으로 격리되려하지만 결코 그 현실을 피할 수는 없다. 어느 날 집에 온 오빠는 아버지의 탈장을 간호해주던 나의 모습을 목격하고서 “이게 아니야. 이건 사람 사는 것이 아니야.”(1:66)라며 절규한다. 이후 열흘 동안 다락방에 처박혀 지내다 집을 나간 오빠는 결국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다. 「닻줄」에서 명호 오빠가 자신이 감당해야할 버거운 짐을 외면하고 끝내 죽게 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녀 소설 속 인물들은 결핍감이나 상실감을 끌어안고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녀의 소설은 삶의 고통과 마주하고 있는 자들이 겪어내는 고군분투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짚어내기 위해서는 삶을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감정이 변화되는 추이라든가 그러한 삶을 추인해 낸 원동력과 삶의 자세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바람막이」에서 정기사는 “어디선가 우연히 어머니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1:98)을 지닌 채 화물차 운전을 하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의 떠돌이 생활은 어머니를 만나고자 하는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부모는 둘 다 한 번씩 결혼에 실패하고 만난 사이라 했다. 아버지는 늦게 얻은 가정에 애착이 많았으나 어머니는 주위에서 입을 댈 만큼 뛰어난 미모와는 달리 덕성을 갖추지 못한 데다, 타고난 바람기까지 있어서 아버지와 다투는 날이 많았다. (…)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이 부쩍 잦아진 것은 자신의 불만을 술로 달래기 시작한 아버지의 음주 탓이었다. 아버지의 폭음은 나중에 폭력까지 동반하였는데 그때부터 어머니는 아예 내놓고 외박을 했다.”(1:93) 부부싸움, 아버지의 폭음과 폭력으로 인해 “노가다 반장이라는 작자와 어머니가 줄행랑”(1:95)을 치고, 술로만 연명하다 몸져누운 아버지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얼룩진 유년의 기억은 그들 형제를 고모네 집으로 데려다 놓는다.       


한번쯤 찾아와 주리라 믿었던 어머니는 소식조차 없었다. 진섭이 어머니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면, 만섭은 될 수 있으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애썼다. 가끔 텔레비전 화면에서 춤을 추거나 도박을 하다 적발된 여자들을 보면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를 떠올렸다. 스카프를 맨 여자를 볼 때도 그랬다. 어머니의 얼굴은 흐릿해져 갔지만 목에 있던 사마귀는 세월이 가도 사라지지 않았다.(1:98)


   만섭은 어려서 그들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를 미워하고 원망하지만 그의 마음 한켠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다. 이 그리움은 애써 지우려는 기억과는 달리 사라지지 않는 어머니의 “목에 있던 사마귀”처럼 만섭의 기억에 남아 있으며, 이 흔적으로 인해 그와 어머니는 재회하게 된다. 

   「어떤 귀향」은 6․25 이후 “고향땅에 갈 때까지는 한실을 고향으로 알고 살겠다”(1:244)던 천억만이 한실에서마저 쫓겨난 후, 40여 년이 지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는 제2의 고향이라고 여긴 마을에서도 좀도둑으로 오인받고 궁지에 내몰리는 이중의 고난을 겪게 된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그들은 넓은 아량을 베풀고 함께 하기보다는 이기심으로 연합해 천억만의 가족을 내쫓았다. “그들은 억만이를 쫓아냄으로써 자신들의 삶터를 지키려고 본능적으로 몸부림을 친 것이었다.”(1:256) 사실상 박노인 역시 “억만이에게 뺏겼던 세 마지기의 논 때문”(1:257)에 마을 사람들과 한 패가 되어 그를 쫓아내는 데 일조했다. 박노인은 이를 은폐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천억만의 아들이 귀향하고자 하는 아버지 대신에 땅을 사러 오면서 지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처럼 「바람막이」에서는 자식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정기사의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떤 귀향」에서는 한실에서 쫓겨난 천억만과 이에 연루된 박노인의 삶이 연동되어 드러난다. 그 이어짐으로 인해 이들은 서로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가난이라는 결여 상태는 소설집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결부되어 있으며, 이들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핍박받는 자들이다. 「어떤 귀향」에서 박노인은 아들의 수술비 마련 때문에 천억만에게 집을 팔게 되지만, 그 저변에는 “사연 댐” 조성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던 터전을 잃어버린 자라는 점에서 천억만이 처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통으로 내몰린 삶이라는 공통된 이력은 그들을 화해시키는 최소한의 요건이 된다.      


“어르신, 지나간 일입니다.”

천 사장이 두 손으로 박 노인의 손을 꽉 잡았다. 

“부끄럽네. 자네 보기 정말 부끄럽고 고맙네. 그러나 내가 자네 부모들에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나. 여기를 고향이라고 찾아오는 자네 부친도 고맙고, 자네의 그 효심도 고맙네. 집이며 논밭을 좋은 값에 사준 자네의 마음을 이제 알았네.”(1:259-260)     


   귀향을 버팀목 삼아 살아왔다는 천억만의 소망은 아들 천사장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다섯 명의 자식들에게 먹이기 위해 쌀을 도둑질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의 설움과 아픈 기억을 “만회하려는 것처럼 참으로 열심히 남을 도우며”(1:259) 살아왔다는 천억만의 삶은 박노인의 가슴에 파고들어 그를 부끄럽게 만든다. 부끄러움은 외면해온 천억만의 가족들과의 조우이면서 동시에 그간 모른 척하고자 했던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이다. 이와 같이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삶의 태도는 그녀의 소설집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윤리이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프레임 속에서는 “어떤 이유나 구실이 필요하지 않”(1:103)는 용서로(「바람막이」), “뜻은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나름대로의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1:79)다는 깨달음으로(「닻줄」) 굴절되기도 하고,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절망하고 절망하고 또 절망하더라도 사랑하기”(1:239)라는 용서의 행위로 형용되기도 한다. 사실 그 단위가 무엇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각자의 삶의 조건 속에서 어떤 계기에 부딪쳐가며 삶의 의미를 새로이 획득한다. 경제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요인에 있어서도 자본주의적 삶의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인물들의 등장은 기존의 삶의 양식과 가치를 무너뜨린다. 시국 관련 수배자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포구 사람들」 속 장씨에게 삶의 의미와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준 것은 천노인과 “뱃사람들의 소탈하고 강인한 삶의 자세”(1:31)이다. “그들과 작업을 하고 한솥밥을 먹고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채록하면서 장씨는 정지된 자신의 삶에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려 애썼다.”(1:31) 외로움과 고립감을 견디지 못해 죽으려고까지 했던 장씨는 다대포에서 새로운 삶을 생성한다. 이러한 삶에의 용기는 20여 년간 현실에 순응하며 “달라진 것도 나아진 것도 없는 상태로 여전히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허덕이는 한 마리 늙어빠진 노새의 신세로”(1:44) 살아가는 배기사가 탈선하는 계기로 작동되기도 한다(「그 여름날의 탈선」). 사납금 인하 등의 권리를 외치며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파업하다 결국 해고된 정기사의 용기있는 모습은 그를 각성시킨다. “나는 정 기사라는 거울을 통하여 비로소 나의 참 모습을 비춰볼 수 있었던 것이다.”(1:52) 지금껏 “알량한 자기 방어 의식”(1:49)만을 가지고 살아온 그와 달리, 정기사의 결단과 용기는 그의 삶을 반추하게 하며 경로 이탈을 만들어낸다. 손님이 놓고 내린 돈뭉치는 사례금, 장한 시민상, 개인 택시라는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기회이지만, 그의 자동차는 돌연 매축지 쪽으로 향한다. 위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있으나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하지 못하는 정기사의 아내와 그런 아내에게 도움은 되지 못하고 노동운동을 거듭해온 배기사가 ‘나’를 동요시킨 것이다. “‘우쨌든 사람을 살리고 봐야제.’ (…) ‘어리석은 놈! 도둑 놈! 굴러들어온 복을 차는 놈!’ 온갖 야유가 내 머릿속에서 난무하고 있었다. 상식에 벗어난 일을 해보는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가? 나는 갑자기 봇물처럼 가슴에 밀려드는 이상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소리내어 울고 싶어졌다.”(1:56) 상식을 넘어선 배기사의 행동이 완전히 정당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으나 최소한 인간이고자 하는 삶을 선택한 그의 행위는 진실한 것이었다. 소설 말미에 그 행동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비극임이 암시되지만 그럼에도 배기사가 이로(異路)를 달린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방랑하는 그들의 삶은 애초부터 정상적인 궤도에 안착할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응시하며 그 삶의 방식을 찬찬히 새김질하듯 그려내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무엇이 가치있는 삶인지를 되돌아보고 묻게 될 것이다. 이 물음을 촉발시키는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은 그러니, 가치있는 것이리라.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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