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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망선배에 올라 동행하기(3)

─고금란 소설의 행보를 따라가다


   4. 경험 속에서 감득한 삶의 진리      


   숱한 파도에 목숨을 잃거나 고난에 부딪쳐 쓰러질 때도 있었지만, 그 파도를 이겨내면서 만들어진 것이 고금란의 작품 세계라 하겠다. 문학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 문학 강좌를 들으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다루는 「문 밖의 여자」에서 관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화한다는” 것이며, 진화한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고통 끝에 얻어지는 것”(2:229)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녀의 소설은 시련을 극복한 후 얻은 쓰디쓴 열매와도 같다. 소설가 스스로도 조금은 만족할 만한 요소들을 지닌 책이라고 평가한 세 번째 작품집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는 앞선 두 권의 책을 통해 감득한 삶의 이야기들을 더욱 밀도있게 서사화하고 있다. 십 년 만에 묶어낸 소설집인 만큼 이번 작품집은 그간의 공백기에 체험한 삶을 억지스럽지 않게 녹여내면서 앞으로 나아갈 그녀의 길의 향방을 보여준다. 앞선 두 권의 소설집에서 보여준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변하지 않으면서 그 외연이 확장된 형태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점에 주목해 몇몇 소설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그 여로를 확인하고자 한다.    

   「두 남자」는 탈북 노동자들의 남한 사회 적응기를 빌어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내면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상 천국”이라 여겼던 남한 사회가 실상은 “돈이라는 무기를 손에 넣”어야만 하는 철저한 경쟁이 숨겨져 있는 “전쟁터”임을, “계속 살아남으려면 자본을 축적하는 방법밖에 없”(3:52)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통해 새터민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잔혹한 역설을 보여준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누리고 있는 그 평범한 일상이 남자에게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별”(3:45)이었다는 표현처럼, 남자는 새로운 사회에 쉽게 정착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새터에 안착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에 적응해 나가야만 한다. 기계처럼 일해도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3:41)는 삶 속에서 그들은 더 깊은 외로움에 빠진다. 그럴수록 벗어나고자 했던 그 사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 또한 깊어진다. 이처럼,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는 가난과 결핍에 천착해 세계상을 그려나가는 그녀 소설의 기본적인 전제는 유지하되, 그 대상을 변주하면서 여전히 가난한 자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보여준다. 특히 “무지개”로 상징되는 꿈을 찾아 국경 내/외부에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을 그려내면서 자본제 사회의 은폐된 착취구조를 드러낸다. 국내로 흘러들어온 이방인의 삶의 모습(「두 남자」)뿐만 아니라 국외로 흘러나간 이방인의 삶의 모습(「라두가」, 「솔롱고스」) 또한 보여주면서, 내부의 위계와 내/외부의 경계 사이에서 구조적 폭력이 끊임없이 양산될 수밖에 없음을 일러준다.      


무지개의 도시 밴쿠버는 인간이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낸 무지개였다. 도심에서 맑은 공기로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결과였고 안락하게 가꾸어놓은 공원길을 걷고 설치된 기구 하나 사용하는 데도 은밀하게 세금이 부과되는 나라였다. 무지개는 멀리서 바라볼 때 아름다운 것이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환상이었다.(3:180)     


   「솔롱고스」에서 ‘나’는 현재, 물질적인 면에서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갖추었지만 80년대 초반 캐나다로 이민온 이후 겪었던 힘들었던 시간을 통해 무지개의 나라라는 꿈은 헛된 환상이었음을 경험으로 체득한다. 가족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부부는 국경을 넘는 선택을 감행하지만, 그곳에서의 삶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그곳은 철저하게 자본의 지배하에 작동된다는 실상을 가까이에서 목격하면서 그 역시 환상일 뿐이었음을 자각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3:179)에서의 힘든 삶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시숙이 빌려간 돈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증명인 “차용증”이었다. 이처럼 자본의 환상을 알게 되면서도 고삐 풀린 자본의 논리를 재확인해 나가는 순환구도는 끊어지지 않는 듯 보이지만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차용증이 “법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3:184) 무용지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지금껏 자신이 믿고 의지해 온 것이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몸소 체험한다. 또한 돈에 대한 소유욕으로 인해 성도착증이라는 정신병을 갖게 된 남편 역시 자본이라는 회로의 허약함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삶 속에서, “내 삶의 방향을 바꿀 어떤 계기”(3:170)를 찾아 아르부르드 사막으로 떠난 ‘나’는 그곳 역시 신기루일 뿐임을 체험한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사막 복판에서 꽃을 피운 자본주의의 위대한 능력에 진심으로 경탄했다. 수백 미터 모래를 파서 물을 길어 올리고 태양열로 전기를 만들어 이용하는 현대 문명의 핵심에 돈이 있었다. 이 시대가 돈으로 힘의 척도를 나타내며 주조된 자유를 보장한다고 본다면 나는 내가 축적한 돈으로 사막에서 일박하는 상품을 산 셈이다.(3:186)     


   위 인용은 체험에 체험을 거듭하면서 부닥치게 되는 것이, 다름 아닌 자본의 강력한 힘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삶의 터전을 옮겨와 느끼게 된 것도, 고생스러운 삶 속에서 버팀목이 되었던 것도, 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여행에서도, 결국 ‘나’가 맞닥뜨린 것은 “자본주의의 위대한 능력”을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삶의 방향전환은 새로운 삶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굴레의 속박을 쉽사리 벗어나기 어렵다는 역설을 재확인해 주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한 것일까.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러한 삶 속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솔롱고스」의 ‘나’는 고달픈 삶의 시간들을 통해 “무지개의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무지개 속이며 이 순간 나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3:190-191) 깨달아야 함을 느낀다. 즉 환상에 사로잡혀 환상을 좇는 현실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대답이다. 그것은 각자가 맡은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 것, 그래야지만 “자유의지로 행동할 수 있”(3:191)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 선택을 집약적으로, 좀 더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름하기」이다. 이 소설에서는 도시에서의 삶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은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남편의 고향으로 회귀한 50대 부부가 등장한다. 이들 역시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동을 통해 삶의 방향전환을 꿈꾼다. 아파트에서의 삶에만 길들여져 있던 인숙에게 “울타리 없는 마당과 어둠은 알 수 없는 부담과 두려움을 주”(3:11)는 것이지만, 남편 선태의 오랜 꿈과 그의 신경성 위장병이 혹시나 나아질까 하는 마음에 그녀는 시골행을 감행하게 된다.    

  

이사를 온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도시로 되돌아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여자의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3:11)     


   그러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고향에서의 삶은 그의 생각처럼 금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었다. 더불어 평생 그를 괴롭혀온 병 또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력과 권력”이 뒷받침되어야지만 살기 좋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설령 그 두 가지를 다 손에 넣었다고 해도 불행이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늘 두려워하고 긴장”(3:18)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선태 역시 겉으로 보기엔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 같지만 언제나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 불안은 선태가 앓는 신경성 위장병으로 드러난다.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철저하게 상징계의 질서를 내면화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가 현실과의 관계를 모두 절연한 채 살아가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선태의 위장병은 체제가 앓고 있는 고질적인 증상이기 때문에 과학적 진보의 대표격이라 할 의학 따위로 완치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 달도 채 넘기지 못하고 도시를 떠나올 때의 “해방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져가고 결국 “후회”와 “자책”, “단절감”(3:13)으로 뒤바뀌면서 선태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자 한다. “농사만 지으면서 유유자적 노후를 즐긴다는 것은 허황한 꿈”이었음을 깨닫고, 한편으론 “아직도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3:23)에 안심하는 그의 모습은 장소 이동을 통해 그의 불안감이 불식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향으로의 회귀를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피하는 것으로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고향 상실로 상징되는 이러한 증상은 채워지지도, 어디로도 회귀할 수도 없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는 철학과 교수인 초등학교 동창 용우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는”(3:16) 용우마저도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3:17)를 바탕으로 재단의 개혁, 참여정부 지지 등을 주장해 온 그의 삶 역시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면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제도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면 모두 함께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 믿었”(3:19)던 그의 신념도 현실에서는 꺾이고, 결국엔 “밑지는 장사”(3:20)로 전락해 버릴 위험성을 지니는 것이 이 사회의 실상이다.      


이사를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도시로 되돌아가자고 했을 때, 여자는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가요. 난 이곳에서 살 테니까.”

여자는 아파트에서 남자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조건이나 장소가 사람을 안심시킬 수 없다. 설득이나 양보가 미덕이라고 믿은 것이 착각이다. 남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은 것이 더 큰 착각이었다. 있는 그대로 봐 주기…….

여자는 홀로서기란 말을 떠올렸다.(3:28)     


   도시에서 자본을 향유하면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존재를 잃어버리고 방황한다. 「사름하기」에서는 고향을 통해 존재 회복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지만, 이 역시 간단하지가 않다. “전쟁터”와 같은 사회에서 “백병전”(3:27)도 마다하지 않던 그의 삶이 “모두들 떠나간 곳”(3:26)에서 되찾아질 리는 만무하다. 그렇기에 그는 아프다. 평생 신경성 위장병을 앓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러한 사회 속에서 존재론적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친구 용우도 점점 지쳐간다. 이와 같이 그녀 소설에서 주를 이루던 가난한 삶을 벗어난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증상을 앓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 면면이 다채롭게 그려지는 것이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가 지닌 미덕이다. 

   이처럼 「사름하기」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앓고 있는 존재들의 증상을 핍진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미덕이 작품 말미에 작가 목소리의 개입으로 인해 약화되는 지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남편의 변덕을 설득하고 양보하면서 살아온 아내는 지금껏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가치관들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봐 주기”로 한다. 인숙은 남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로 하지만 남편의 신경성 위장병으로 드러난 현대인의 존재론적인 불안과 그 징후, 자본에의 포섭은 그것으로 인해 사라지거나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 스스로만을 위무하는 듯한 이러한 입장은 자칫 잘못하면 다양한 입장차를 제거하고 봉합함으로써,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을 합리화하는 제스처로 읽힐 위험성이 있다. “남자의 양 어깨에 앉아 있는 납덩이를 보는 일은 정말 지겹다. 그것은 누군가가 덜어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임을 여자는 이제야 깨닫는다”(3:29)라는 표현처럼, “일체의 의존에서 벗어나”(3:28) 홀로 서는 것이야말로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숙의 자기 위안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써 여자는 남편의 문제를 초월할 수 있으나, 남편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한 여전히 그 증상을 극복할 수 없다. 설사 깨닫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하게 극복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은 아픔을 함께 나누고, 함께 나아가기를 주저한다. 「두 남자」의 사내와 남자는 한 달 동안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는다. 서로를 “동반자”로 보아야 할지 “경쟁자”로 보아야 할지 고민하다 한 마디 말을 건네지만, 끝내 “사내와 남자는 한발자국도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3:52)는 소설의 마무리처럼 그들은 계속적인 고립 상태에 머물러 있다. 「소(牛) 키우는 여자」에서도 구제역이 자신의 소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진구네는 전전긍긍하지만 사람들은 “걱정하는 척, 위로하는 척, 쉬쉬하며 의견들을 나누”(3:73-74)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려한다. 「은행나무 그늘」에서도 마을의 공공재인 은행나무 열매를 더 많이 따기 위해서 김 마담과 노랑머리가 싸움을 해도, “하나라도 더 줍겠다고 혈안이던 할머니들은 자리를 뜨”(3:218)거나 ‘나’는 “노랑머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은행나무를 올려다보았다”(3:219)는 것을 통해 이들은 서로를 애써 외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삶의 진리를 깨우친 것 같지만, 사실은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지 않고 눈감아 버린 것이다. 그것은 소설이 현실과 인물들이 경합해 나가고 있는 양상을 다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던 것을 결론에서 하나의 통합된 목소리로 회수해 버리는 것과도 동일선상에 놓여진다. 작품 중간중간에 펼쳐지는 인물들 간의 살아있는 관계와 긴장과 같은 유의미한 지점들이 제거되어 버리는 결말이 많이 아쉽다.

   이러한 지적이, 거친 돌풍과 맞서 싸우며 지난한 세월들을 이겨내면서 점차 체력의 한계를 경험하고, 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소설가의 삶과 배리된 언어가 아니었기를 바란다. 정면돌파하는 삶, 함께 싸우는 삶을 살아오다가 힘에 부친다는 것을 몸소 느끼며, 그러나 전위가 아니더라도, 함께 싸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품고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삶의 진정성이 또 다른 문학으로 변신하기를 응원한다. 작품 내외를 아우르면서 등장인물들과의 경합을 통해 대화적인 목소리를 생성해내고, 전복가능한 삶을 일구어내는 것이 문학, 소설이 가진 힘이자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의 사투, 극복, 초월로 끝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투하면서 첨예한 긴장을 생성해 나가는 문학으로 또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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