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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상처가 남긴 흔적들(1)

─김현의 『식탁이 있는 그림』과 『장미화분』을 중심으로


* 두 권의 작품집을 대상 텍스트로 삼았다. 『식탁이 있는 그림』(전망, 2002)을 인용할 때에는 (1:쪽수)로, 두 번째 작품집인 『장미화분』(산지니, 2012)을 인용할 때에는 (2:쪽수)로 간략히 표기하기로 한다.





   1.

      

   1999년 《한국소설》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김현은 2002년에 작품집 『식탁이 있는 그림』을 묶어냈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세상살이가 즐거웠다면 나는 아마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감당 못할 외로움과 삶의 허랑함들이 나에게 글을 쓰게 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뇌는 실존적 외로움, 그리고 소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글쓰기는 세상살이의 아픔이 남긴 흔적이자 기록이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픔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예기치 않은 일을 겪고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에 아파하는 이도 있다. 그것은 말이나 행동과 같이 겉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슴 깊숙이 파묻혀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군상이 다양하듯 그들이 겪는 아픔의 양태 또한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렇게 끊이지 않는 인간과 세계의 고통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 우리는 고통을 겪은 타자와 어떻게 조우할 수 있을까. 한 소설가는 “타인의 고통을 감지해서 자신의 고통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인간의 고귀함을 증언하는 최후의 방어선 같은 거라고”(김연수,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한강과의 대화」, 『창작과비평』 165호, 2014년 가을호, 321-322쪽.) 말했다. 다른 이의 고통이 완전히 자기화될 수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의 고통에 몸을 기울이”며 그 불가능함을 넘어섬으로써 비로소 타자의 고통을 마주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의미일 터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남길 수도 있지만 타자를 이해하는 최초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김현 소설에서는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요컨대 상처입은 자들이 뱉어낸 말들이 초래하는 파문은 어떤 모습일까.     


      

   2.      


   김현의 소설은 ‘나’에 대한 탐색으로부터 시작된다. 첫 번째 작품집의 표제작이자 등단작이기도 한 「식탁이 있는 그림」은 ‘나’가 일곱 살 때에 로반 다방에서 보았던 그림을 제목으로 사용한 것인데 그것은 서술자의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나’는 “풍성하게 번진 석양을 배경으로 가족들이 단란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1:37-38)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과 명징하게 대비되며, 행복한 가족의 모습은 그림 속의 풍경으로만 제시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지향하지만 결코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불행한 삶의 그늘이 ‘나’에게는 늘 드리워져 있다. 정태적인 그림은 역동적인 삶과는 반대되는 비현실을 의미한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사랑했지만 현실적인 제약 탓에 결혼에 이르지 못한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을 하지만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결국 ‘나’를 낳게 된다. 딸 둘만 낳은 큰어머니와 달리 아들인 ‘나’를 낳자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를 완강하게 반대하지 못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겨울부터 방학만 되면 ‘나’는 할아버지 댁에 가서 그들 가족과 함께 지내다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한다. 

   차별없이 지낸 듯하지만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한 반쪽짜리 가족생활은 ‘나’에게 상처로 남는다. 큰어머니에게서 들은 ‘외방자식’이라는 말. 그렇게 낙인처럼 찍힌 첩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는 지연과의 사랑에도 걸림돌이 된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사랑은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준 셈이 됐다.”(1:55) 문신과 같이 ‘나’에게 새겨진 저 표식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고, 그럴수록 ‘나’는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다. “어떤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근원적인 뿌리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녀를 포기하는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은 자신을 재확인하는 일”(1:54)이었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운명과도 같은 상황들을 맞닥뜨리면서 ‘나’는 매 순간 뿌리를 확인하게 된다. 비극적인 사랑으로 시작된 ‘나’의 삶은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대물림되듯 이어진다. 마치 비슷한 시점에 죽음을 목전에 둔 큰어머니와 어머니의 운명과도 같다. 거스를 수 없는 수레바퀴 아래에서 여태껏 스스로를 방기한 채로 살아가던 ‘나’는 두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야 겨우 깨닫게 된다. 그림 속 가족의 이미지는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사회가 강요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말이다. 익히 알고 있듯 가족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식탁이 있는 그림」은 이를 정체성 탐색의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등단작을 통해 드러난 자아의 정체성 탐색이라는 테마는 글쓰기와 말하기라는 방법을 통해 구현된다. 글 쓰는 이를 작중 인물화하여 작가의 분신으로 등장시키는 일은 소설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작법이라 특별하지는 않다. 그러나 글쓰기와 말하기라는 방식을 거치면서 비로소 자기에게로만 몰입하지 않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문학이 자기 내면에 집중하지만 동시에 세상과 접점을 찾으려는 행위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비상」에서 정희는 가족들 모르게 비밀스럽게 소설 쓰기를 행하고, 「언덕 아래 하얀 집」은 비오는 야심한 밤 ‘나’가 마음의 지옥을 다녀 온 세 차례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비상」의 정희는 교통사고로 생긴 오른쪽 허벅지의 상처로 인해 세상과 단절된다. 남자라 지칭되는 남편이 자신의 상처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부부관계마저 소원해진다. 그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희는 소설을 빌어 주인공 남자를 잔인하게 죽이려 한다. 정희의 소설(내화)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는 하나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결혼이라는 제도 내적으로 부과된 이름이 아닌 남자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상대를 객관화하고자 하며,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요인들 중 하나인 남자를 소설이라는 장치를 활용하여 살해하려한다.

   하지만 정희는 그와 같은 시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또 다른 여성을 통해 깨닫는다. 소설 속에는 정희와 비슷하게 무료한 삶을 살아가는 옆집 여자가 나오는데 그녀는 끝내 “살아내야 할 가치”(1:29)를 찾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우연한 기회에 옆집 여자를 만남으로써 정희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로써 자신이 기획했던 소설의 결말을 변경한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고 질긴 삶의 질곡 속으로 남자는 던져졌다. 소설 속의 남자는 살아있음이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었다.”(1:30) 옆집 여자로 인해 정희가 쓰던 소설 속 남자는 삶의 질곡으로 내던져진다. 겉으로 볼 때는 행복한 가정처럼 보이지만 옆집 여자는 외롭게 내버려져 있었다. 남편의 외도와 아이들의 무관심으로 가족 내에서 그녀는 “낡고 오래된 가구”(1:22)와 같은 취급을 받아 왔다. 정희가 알게 된 옆집 여자의 속사정은 사실 정희의 삶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정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고 글쓰기로 인해 삶의 질곡을 표현하고자 한다. 정희가 비밀스레 소설을 쓰는 행위는 자신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고 살아내는 일의 역설을 확인하며 삶을 추진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삶의 회의나 모멸감이 일시에 해소되지는 않는다. 「언덕 아래 하얀 집」에서 ‘나’는 내가 겪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하소연하듯이 말하고 있다. 뭇사람들처럼 ‘나’ 역시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에 살고 싶지만 현실은 “언덕 아래 어두운 지옥”(1:103)으로 곤두박질치는 경험으로 점철된다.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은 남편”(1:88)이며, 이때 지옥이란 남편과의 결혼 생활 속에서 말과 행동 때문에 받은 상처들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여자로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막말을 하거나, 다른 부인과 비교를 하며 모욕을 주기도 하고, 결혼기념일에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던 약속을 저버리는 남편의 사소한 행동들은 그녀에게 모욕적인 언사로 기억된다. 특히 고생 끝에 얻은 사십팔 평짜리 집을 여자의 이름으로 등기 등록을 하기로 약속했다가 “아직까지 한국 사람 정서로는 남자 이름으로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1:102-103) 같다며 한 순간 ‘나’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사실, 살다보면 별 것 아닌 듯해 보이는 이와 같은 사소한 일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기도 한다. 「언덕 아래 하얀 집」은 그 심정을 서술자가 독백조로 말하는 방식을 통해 일상에서 타인에게 받게 되는 아픔과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은 일시에 전복되지는 않으며 ‘나’는 지금도 결혼이라는 제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아간다. 허나 그 현실은 “세상살이의 엄숙함이 구체성을 띄고 다가”(1:97)오는 경험들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차분하게 들려주고 있다는 점이 김현 소설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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