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란 소설의 행보를 따라가다
3. 깊게, 짙어져 가는 고통과 마주하기
첫 소설집을 관통하는 가난과 결핍의 서사는 두 번째 소설집에서도 지속된다. 이들 인물들이 간직한 어둠의 터널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가다 보면, 『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다』를 만날 수가 있다. 존재의 그늘은 더욱 깊어지고, 그만큼 세상의 변화는 가속화된다. 아니,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어둠과 그늘은 존재한다는 역설이 확인될 뿐이다. 두 번째 소설집은 표제작과 같이, 자본주의적 삶과 욕망의 고리, 이로부터 소외된 존재의 외로움과 고립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상철은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서 온몸이 젖은 채 차를 살리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는 시각에도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데 묘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는 돈을 벌면 미련없이 이 동네를 떠나리라 마음을 다시 한번 다졌다.(2:123)
「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다」에서는 자동차 세일즈를 하며 살아가는 상철이 등장한다. 문명의 이기의 대표격인 자동차를 판매하는 그의 삶은 서글프고 궁핍하다. “전형적인 공단의 셋방에서 약간 벗어난 다세대 주택”(2:127)에서 살며 월세를 줄이기 위해 3년 동안 적금을 붓고 있지만 “여전히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살림살이”(2:127)가 계속된다. 그런 그에게 자동차는 분에 넘치는 사치품이지만, 한 대만 더 판매하면 받게 될 수당 때문에 스스로 고객이 되어 자동차를 구매한다. 그러나 자동차를 획득함으로 자신의 위치까지 변동된 것은 아니다. 태풍이 할퀴고 간 자리에서 그의 자동차는 먹통으로 전락한다. 물난리통에 차 수리비용이 더 들어가면서 세상에 대한 배신감은 더 커져만 간다. 더욱이 그 일로 인한 삼촌의 잔소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알게 된 어머니의 불륜을 환기시킨다. 과거의 일을 묻어두고 살아가는 가족의 비애감은, 자동차 구매와 태풍 피해가 겹쳐진 불운으로 현실화되고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불안을 수면 위로 부상시킨다. “결국 이번 태풍 피해는 상철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여러 불안 중의 하나가 현실로 나타난 셈이었다.”(2:135) 그 불안을 일시적으로나마 해소시켜주는 것은 “맞은 편에 달려오는 차가 없다는 것이 그를 매우 편안하게” 해주는 터널 속으로 진입하는 방법뿐이다. “전혀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2:136)는 터널은 “딴 세상”처럼 느껴지며, 그곳에서 그는 “근원적인 편안함”을 맛본다. 상철은 자본의 논리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거부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어정쩡한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활 리듬이 헝크러진 실처럼 되어버렸지만, 어디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알 수 없다기보다 잘못된 부분을 정확하게 안다는 자체가 두려운 것인지도 몰랐다.”(2:137-138)는 구절은 그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보여준다. 외면하고 도피하는 것만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그는 터널로 상징되는 더 깊은 어둠으로 침잠함으로써 불안을 잠식시키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마음의 안식처인 터널은 다시금 강력한 자본이라는 빛을 만나게 되어있다는 점에서 「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다」는 영원히 그 터널 속에서 위안을 얻을 수는 없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이 그녀의 두 번째 소설집은 상반되는 두 개의 구도가 완전히 이분화될 수 없는 양가적인 것임을 일러주며 그 뒤얽힘을 표현해 내고 있다. 유동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보여준 첫 번째 소설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다』에서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는 ‘울타리’ 혹은 ‘바람막이’이다. 그것이 가정 혹은 가족으로 치환되는 만큼, 그녀에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소설을 추동시키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가족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행복을 가장한 채, 혹은 가난과 결핍이라는 굴레는 트라우마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튼튼한 울타리나 바람막이를 원하지만 가족이 완전한 방패막이가 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내/외부가 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몇 편의 작품들이 있다.
십 년 이상 고무공장을 전전하다 근배와 함께 동업을 시작한 「歸着地」의 ‘나’는 돈 없고, “돈 벌 능력을 잃은”, “병신이 된 남자”(2:195)이다. 그는 작업 중 장갑이 기계에 끼여 세 개의 손가락이 잘려나간 후 실어증에 걸린 상태로 집에 틀어박혀있다. “아내와 나는 근본적으로 서있는 위치가 달랐다. 나는 가장이었고 아내를 보호해 주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2:195) 가장의 위치에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나’는 과거형의 문장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가장이 될 수 없는 처지이다. 가장이어야 했던 그는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쳐 가장이 아닌 위치로 전락한다. 담배를 살 수도, 아들 욱이를 유치원에 입학시킬 수도, 아내가 원하는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시킬 수도 없다. “나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2:197)라는 문장은 구조적 폭력에 희생된 ‘나’의 삶에 대한 처절함과 두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고작 만원을 벌기 위해 임신한 아내는 꽃을 만들고, 백원이 없어 아들 욱이는 콩콩을 타지 못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더 ‘나’를 옥죈다. “아무튼 이 지독한 두려움과 절망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나는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2:209) 어떻게 살아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나’는 결국 자해로 삶을 끝내려고 한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끔 어릴 때처럼 헛울음을 우는 기분이었다. 도망치려다가 잡힌 것 같아서 민망했다. 아내는 내가 피를 쏟은 것이 아깝고 안타까워서 속을 태웠지만, 나는 속에 있던 덩어리를 몽땅 뽑아버린 것처럼 홀가분했다.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렵게 시도했던 탈출의 귀착지가 이곳이라면 나는 결국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2:210)
죽음으로 삶의 괴로움을 씻어내고자 했으나 ‘나’는 죽지 못했고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달라진 점은 죽음 근처에까지 이른 경험을 통해 그것이 현실도피일 뿐임을 체득한 것이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재시작하려는 ‘나’는 “다행히도 정말 다행하게도 내게는 아직 일곱 개의 손가락이 남아 있”(2:210)음을 깨닫는다. 절망 속에서 삶을 죽임으로써 죽음으로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가야할 삶에의 의지가 필요함을 체감한다. ‘나’의 귀착지는 다름 아닌 삶의 자리라는 자각에서 재출발하는 생에의 의지는 “말꼭지”로 발화되고 아내의 “박꽃 같은 웃음”(2:211)으로 번져간다.
「歸着地」가 절망의 끝에서 되찾은 다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가족 속에서 실현해 나가고자 함을 보여주는 데 반해, 「방파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미묘하게 생겨나는 균열을 포착해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는 가출한 딸 은주를 찾아 부산에 도착한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착잡한 심정이었으나, 하필 그곳이 부산이라는 점 또한 그를 불편하게 한다. “아픔과 굴욕의 기억밖에 없는 부산 땅을 삼십오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외면”(2:41)하고 살아온 ‘나’는 부산에 당도하면서 어린 시절에 대한 상처들과도 대면하게 된다. 기억 저편에 묻어둔 상처는 출세해서 성공한 그의 현재와는 전혀 다른, 충무동 쓰레기 매립지에서의 삶을 불러일으킨다. 남쪽으로 피난오던 길에 비행기 폭격으로 아버지가 죽은 일,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복어알로 끓인 국을 먹고 동생 현지와 현봉이가 죽은 일, 거지 생활을 했던 시간 등은 부산이라는 장소 속에서 “떠올리기 싫지만 떠올릴 수밖에 없”(2:48)는 가난의 상처들이다. 이는 부산 남부민동에 실재하는 방파제로, 현수가 튼튼하게 쌓아올린 방파제라는 메타포로 중의적으로 드러난다. “잔고가 충분히 들어있는 현금카드와 몇 개의 신용카드, 스포츠 센타 회원증과 신분증 따위는 그를 지켜주는 방파제였다”(2:43)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현수가 감당할 수 없는 파고에 부딪히면서 착실하게 쌓아온 방파제는 모두 자본으로 환수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튼튼함은 실상 허약함을 은폐하고 있기에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은주의 가출로부터 서서히 인식하게 된다. 현수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면서 견고한 방파제를 쌓을 수 있었으나, 그 방파제가 똑같은 의미로 은주의 삶에서 재현될 수는 없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현된 방파제의 붕괴라는 상징성은 이성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피난길에 맞닥뜨린 비행기 폭격 당시, 파편의 영향으로 남은 엄지발가락의 통증이 몸에 각인된 것처럼, 외형상 아무런 상처가 없음에도 신체에 새겨진 흔적으로 인한 통증은 불쑥 그를 찾아와 그의 삶을 교란시킨다.
발가락의 통증은 미진하게 계속되고 있었고 몸은 몹시 피곤했다. 마치 오랜 시간을 계속 버거운 짐을 지고 걸어온 듯한 외로움과 곤고함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한순간도 그 짐을 등에서 내려놓지 않고 살아온 것 같았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 도시를 등지고 살아온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랬다. 이제는 이 도시에서 있었던 암울한 기억들을 이 도시에 남김없이 부려 놓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일만 남았다. 그는 은주를 방파제로 불러내기로 마음먹었다.(2:64)
“딸아이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달랐다”(2:46)는 단적인 표현으로 드러나듯, 현수가 꿈꾸는 단란한 가정은 은주로 인해 망가진다. 딸이 장애를 가진 남자와 함께 종적을 감췄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조롱의 시선이 견디기 어려워 그는 딸을 찾아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는 달리, 은주는 행복한 삶을 설계해 나간다. “그녀는 상규를 통하여 무엇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정말 아름다운 것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2:55) 보이는 것만으로 규정내려지는 현실의 논리에서 한 발 물러나 방파제 근처에 위치한 상규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을 통해 행복을 누리는 은주는, 현수와는 다른 의미에서 새로운 방파제를 쌓아나간다. 문학과 사랑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찾아나서는 그들의 확신에 찬 모습은 현수에게도 목격된다. 부녀의 방파제에서의 조우를 앞두고 끝나는 소설처럼 그 새로운 시작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어떤 희망을 담고 있는 새로운 발걸음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부모님 아래에서 외롭게 자라는 성겸의 방황기를 그리고 있는 「안개 잦은 지역」에서 가족은 “깨진 유리컵”(2:25)으로 비유된다. 「종점」의 ‘나’는 아내가 죽은 후 큰아들과 작은아들 집을 번갈아가며 지내다 독립하지만, 결국 버려져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없이 혼자가 되어버린 노인의 쓸쓸한 노년 풍경을 보여준다. 유괴범의 아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일에만 매달려 세상과 단절된 고독한 삶을 살아온 「聖所」의 ‘나’도, 초혼과 재혼한 남편이 모두 죽고 월내로 돌아와 살다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말례도(「썰물」), 딸 말례가 재혼한 남편과 전처 사이에 난 남매를 거두어 살아가고자 하는 제주댁도, 모두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하나같이 결핍을 겪는 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은 안정적인 삶에 안착하지 못한 채 불안감, 답답함, 막막함 등을 느끼며 살아가는, 문 밖의 사람들이다. 가족이 든든한 배경이 되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본의 관문은 그리 쉽게 열리지 않으며, 설사 그 문을 통과했다하더라도 고립과 고독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한다. 거친 파고를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 이들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으며, 이들의 험난한 항해는 계속된다.
(이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