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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상처가 남긴 흔적들(2)

─김현의 『식탁이 있는 그림』과 『장미화분』을 중심으로


   3.

      

   특히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대체로 가족이라는 점이 첫 번째 작품집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식탁이 있는 그림」은 한 아버지에 두 어머니라는 자신의 근원에서부터 출발하며, 「파문」은 결혼과 사랑의 실패와 어긋남이 ‘나’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이 역시 가족 제도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다. ‘나’는 부모가 결혼한 지 아홉달만에 태어난 혼외자식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새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혈육이 아닌 ‘나’에게 “더욱 심해지는 아버지의 냉대를 견뎌내기란 너무도 큰 고통이었다. 결국 아버지와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됐을 때 나는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1:71) 그렇게 도망치듯 떠난 미국에서 ‘나’는 한국 여자를 소개받아 결혼을 하고 딸을 낳지만 열악하고 불안정한 삶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된다. 자신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결혼한 두 사람에게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고, “서로에게 애정 없는 결혼은 무책임한 선택”(1:77)으로 서로의 삶에 더 큰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스산하고 삭막”(1:75)한 아내와의 잠자리에 ‘나’는 혐오감을 느끼지만 반대로 일상의 만족과 편안함으로부터 등을 돌린 ‘나’의 행동은 의도와 달리 아내를 외롭게 방치해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랜 병을 앓아온 친정어머니의 병간호에 찌들어 있던 아내에게 ‘나’는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기는커녕 또 다른 속박으로 인식되고 만다. “나에게 당신은, 아니 미국이란 나라는 거대한 감옥 같았어요. 날 가두고 억누르고 짓밟고…”(1:74) 부모의 어긋난 인연은 ‘나’의 삶을 국경 바깥으로 내몰았지만 그곳에서의 결혼 역시 실패로 끝나면서 ‘나’는 다시 귀국을 선택한다. 하지만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나’는 여인숙을 배회하며 세상 사람들의 알량한 사랑싸움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학대의 고통에서 죽어간 어머니의 삶은 상처받은 ‘나’의 인생으로, 외롭고 가난한 아내의 삶으로, 또 딸 수지에게로 이어진다. “내 아이 역시 여러 모양의 상처를 받으며 세상을 살아가게 되겠지. 눈두덩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솟구쳤다.”(1:79) 이처럼 가족이라는 굴레는 그리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가족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의 근원이기도 하다.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동반된 외로움을 통해 이들은 비로소 서로 간의 차이를 재인식한다. 가족이라는 집단으로 연합될 수도 있지만 한편 그 구성원들은 모두 고유성을 갖는 타자이기도 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가족으로 인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드는 한편, 서로가 각기 다른 존재라는 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식탁이 있는 그림』은 부부나 부모자식 간의 애정과 사랑이 변화되는 양상을 통해 인물들이 느낀 미묘하게 다른 감정을 그리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각각의 단편은 비슷한 듯 다른 행동 방식을 보여주면서 미세한 차이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금붕어」에서 유진은 자신을 아기라고 부르는 남자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언뜻 보면 다감한 호칭처럼 들리지만 이는 아버지-자식과 같이 유진을 거느리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남자는 집‘안’에서는 유진을 장악하는 가부장적인 인간이다.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는 지나치게 몰입하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강요하지만 정작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즉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삶은 거부한다. 그와 같은 모순적인 행동은 집 바깥에서의 전혀 다른 삶으로 드러난다. 남자는 매력적인 외향을 지닌 25층 여자와 외도를 한다. 가정 내에서 유진에게 보여준 강압적인 행동과는 정반대로 남자는 그녀에게 아기처럼 군다. 남자의 어긋난 사랑 방식은 부인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25층 여자에게 굴종하는 형태로 극단화되어 있다. 이러한 남자의 사도마조히즘적 취향은 서사를 극단적 결말로 유도한다. 유진은 결국 남자가 좋아하는 금붕어를 모조리 죽임으로써, 남자에게 대리 복수를 행한다.  

   금붕어에게 투영된 남편 죽이기는 앞서 살펴본 「비상」에서처럼 소설 속 주인공에게로 전이되기도 하지만 두 단편의 결말 처리 방식은 상이하다. 상대를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이 단숨에 해소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살아내는 지난한 과정을 겪음으로써 삶을 견디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잠깐의 해방구를 부여하기도 한다. 「억새를 위한 노래」 속 ‘나’는 남편에게 기어이 혜영과의 시간을 허락하며 한 발짝 물러서기도 한다. 항암치료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던 그가 손에서 놓지 않던 억새를 노래한 시집의 저자가 바로 그녀다.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그에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사람이 혜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를 찾아와 병간호를 간곡히 부탁한 그녀에게 ‘나’는 그 자리를 내어준다. 자신의 증오와 분노가 남편에게는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의 선택을 결코 체념적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가 ‘나’와 다른 존재인 남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인고의 시간들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열매를 맺는다. 염세적 태도를 보이는 서술자들을 대다수의 단편에 등장시킨 첫 번째 작품집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는 암울하지만 「무화과나무」에서만큼은 그와 같은 정조가 일관되게 유지되지 않는다. “애초부터 나에게 아버지는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없다는 현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1:178) 그런 ‘나’에게 “사람사이의 따뜻한 정을 알게 해”(1:181) 준 장본인이 새아버지였다. 근원적인 부재로 인한 결핍을 채워준 아버지 덕분에 ‘나’는 가족의 소중함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 어렸을 적에 가족들에게 당했던 수모와 모멸은 사람에 대한 공포심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동일한 핏줄이 아니라며 ‘나’를 철저히 구분짓던 언니와 오빠의 행동은 ‘나’에게 트라우마를 남긴다. 가족은 ‘나’에게 사랑을 알려주고,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때 고통은 ‘나’에게 생긴 원인불명의 다리 통증으로, 사랑의 상징은 아버지의 품이라 할 명륜동 집의 무화과나무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그마저 사라질 위기에 놓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빠와 ‘나’에게 공동명의로 남긴 집이 언니와 오빠의 상가 건축 계획으로 곧 헐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사생아였던 ‘나’를 사랑으로 돌봐준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흔적은 그렇게 사라져간다. 유산은 받지 않더라도 무화과나무만큼은 남겨달라는 ‘나’의 부탁은 끝내 외면당할 것이다. 「무화과나무」의 결말은 그마저 뿌리 뽑힐 것임을 추측케 한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로 인해 새로운 삶을 부여받고 살아갈 수 있었다. 부정(父情)은 여타 소설에서 보여준 부정(否定)적인 가족 관계와 사랑의 어긋남과는 다른 따뜻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면모들이 현실을 전복시킬 만큼 거대한 힘을 지니지는 않지만 조금씩 변해가는 인물의 심리 묘사를 통해 ‘나’와 다른 존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획득할 수는 있다.


          

   4.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 범주를 넓혀 나간다. ‘나’ 혹은 가족이라는 동심원적 구도를 중심으로 이야기한 첫 번째 작품집의 특성을 벗어나, 『장미화분』에서는 사회적 의제들을 접목시켜 ‘나’와 다른 이들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우선 노인들의 현실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소등」은 늙고 병든 노인들의 요양병원에서의 삶과 죽음을, 「7번 출구」는 갈 곳 없는 노인들의 놀이터인 노인 전용 콜라텍을 배경으로 한 상준과 선희의 사랑을 다룬다. 요양병원 “직원의 말투는 고압적이고 딱딱”(2:38)하며, 그곳 “병실의 침대에는 각각 번호를 붙여놓았다. 서로를 부를 때도 이름보다는 3번이나 8번 같은 번호로 통했다.”(2:40) 이름도 없이 사물화되고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참담함 속에서도 “노인에겐 지금의 현실을 거역할 힘이 없다.”(2:47) 사회로부터 내버려지고 요양병원으로 내몰린 노인들은 죽음을 목전에 둔 채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 봉선화 할머니의 급작스런 죽음처럼 졸지에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하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규정에 따라 요양병원에서마저 쫓겨날 처지에 처하기도 한다. 노인인구는 점차 증가하지만 사회적 안전망은 확충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소멸되어 갈 뿐이다. “마치 죽음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나른해지며 어깨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2:60)  

   그러나 어둠 속으로 꺼져가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소설 초반부에서 노인은 “깜깜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꿈”(2:37)을 꾸고도 다른 환자들의 잠을 깨울까봐 불을 켜지 못했으나 말미에 가서는 “견딜 수 없는 어둠에서 벗어나”(2:62)기 위해 점등을 시도한다. 「소등」은 일생 동안 돌보지 못한 자신의 삶과 대면하는 순간을 그린 소설이다. 이는 황혼기에 찾아온 새로운 사랑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와도 같다. 「7번 출구」에서 상준은 갈 곳이 없는 “노인들의 해방구. 젊은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시한부 해방구”(2:70)인 콜라텍에서 선희를 만나 이내 사랑에 빠진다. 서로를 의지해 남은 생을 보내고 싶은 이들은 결혼하기로 마음먹지만 상준의 아들의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 설득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으나 아들의 완강한 태도가 적지 않게 서운한 상준이다. 늘그막에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황혼이혼을 선택한 아내처럼, 그 역시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선희와의 결혼을 택한다. “그래,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네가 정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택하라니 할 수 없다. 나는 이 사람과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2:92) ‘7번 출구’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가파른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것과 같이 상준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서 있다. 「7번 출구」는 그 실존의 갈등과 최종 선택을 형상화한다.  

엄마도 누군가의 아내, 엄마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여자임과 같이 노인이라고 생동하는 삶을 살 수 없거나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서 부여받은 지위나 역할에 걸맞은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유의미하다. 사회 구조가 양산해 낸 노인문제에 기반한 것이라면 말이다. 다만 여섯 가지 병을 모두 앓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요양병원에서 쫓겨나는 처지에 놓이고(「소등」),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시한부 해방구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노인들의 삶(「7번 출구」)을 좀 더 초점화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박카스 할머니의 삶을 다룬 영화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감독, 2016)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에게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로 소문난 소영이 사는 게 힘들어 죽고 싶은 노인들을 실제로 죽여주기도 한다는 반전을 내포하고 있다. 성매매와 안락사라는 어려운 주제를 다루지만 그것은 주인공의 삶의 내력에 녹아들어 자연스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아이를 버리고 양미숙이라는 본명 대신 윤소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과거와 이름을 지우고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홀로 남은 코피노를 거둬 보살펴주고, 길고양이도 애정으로 돌본다. 트랜스젠더, 장애라는 표상으로 드러나는 집 주인, 옆방 청년과도 유사 가족적인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치열한 생존의 논리가 아닌 처절함 삶 속에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소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 시스템의 이면이 노출된다. 거기서 그녀 역시 두렵지만 담대하게 노인들의 죽음을 돕는 일을 결행해 나간다. 그녀의 반사회적 행위는 체포됨으로써 막을 내리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의연하게 행동하는 소영을 통해 우리는 개인과 사회에 얽혀 있는 복합적인 문제들을 더욱 깊이있게 사유할 수 있다. 

   ‘나’ 혹은 가족을 넘어 노인문제로까지 외연이 확대된 존재들은 더욱 다양한 양태를 띤다. 결혼 이주 여성이 한국에서 정착하기 어려운 현실(「장미화분」)이라든가 잠녀의 고단한 삶(「숨비소리」), 가야금 만드는 장인의 가업을 이어가려는 석주의 삶(「연장」)이 형상화되는 것이 그 예들이다. 「장미화분」에서는 한국으로 시집 온 보파에게 닥치는 시련들이 그려진다. 기회를 엿보다 성희롱을 하는 아주버님과 집안일에 무관심한 시아버지만 하더라도 ‘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가 않다. 허나 남편마저 난폭한 성생활로 ‘나’를 지치게 만들며 끝내는 ‘나’와 딸 수지를 버리고 잠적해 버린다. 고향집에서도 성화다. 결혼 후 꼬박꼬박 돈을 부치라며 언니를 들볶은 것과 마찬가지로 매달 월급날이면 송금을 독촉한다. 안팎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외국인 여성의 팍팍한 삶은 주체가 바뀌었다 뿐이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사회적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한 여성의 고통은 해소되지 않는다.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딸과 함께 살아내야 한다는 현실을 인지한 그녀는 소설 말미에서 자립하기로 결심한다. “최고의 장미를 얻기 위해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작업을”(2:30) 하는 것처럼 이 시련은 보파를 강인하게 만든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주검조차 찾지 못한 남편을 둔 잠녀의 생의 터전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이다. 생과 사를 동시에 함의하는 바다를 평생의 고향 삼아 살아온 잠녀의 삶 역시 서서히 쇠락해 간다. 협심증으로 인한 통증과 어촌계의 관리 감독하에 이루어지는 제한된 물질은 그 옛날의 풍요로운 삶을 빼앗아가 버렸다. 「숨비소리」에서 잠녀는 남편의 넋을 위로하는 굿을 해 주고 자신 역시 바다로 자맥질해 들어간다. 「7번 출구」에서 상준이 재혼을 선택한 것과 같이, 「숨비소리」의 잠녀는 고향(바다)으로 회귀하고, 「연장」 또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가야금 제작 공정의 업을 잇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일이 점차 확장되어 무수한 타자들과 만나지만 그 불안정함이 명징한 귀환의 서사로 귀결되었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소등」에서도 “노인의 관심은 온통 아들에게 쏠려 있”(2:50)는 것처럼, 이들은 대체로 가족, 고향, 결혼으로 다시금 결박되어버린다. 물론 가족 그 자체가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작가의 말」에서 몸이 많이 아파 마음까지 피폐해져 간 시간들을 보내며 “곁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2:242-243)고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 이해 못할 대목은 아니다. 그러니 오히려 그렇게 흔들리고 상처받은 자들의 이야기는 회귀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되돌아갈 수 없는 그들의 삶은 서술자의 목소리가 개입되어 적확한 언어로 서술되기보다 그저 보여주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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