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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상처가 남긴 흔적들(3)

─김현의 『식탁이 있는 그림』과 『장미화분』을 중심으로


   5.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 해도 사랑이 함의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코 합일할 수 없다. 각자 다른 이유로 이별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이란 불가능하다는 역설을 보여주는 「이유」와 같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쉽사리 상대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인 타자를 ‘나’를 해치는 괴물이나 악마 혹은 에이리언으로 비유할까. 그렇다하더라도 이는 회피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들을 혐오의 대상, 부정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짓는 규율일 것이다. ‘나’와 다른 낯선 타자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그것은 이해 불가능한 존재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대면함으로써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질 수 있다.     

   따라서 「타인들의 대화」와 같은 소설이 두 번째 작품집에서 좀 더 의미를 지닌다. 골다공증을 앓던 엄마는 결국 걷지 못하게 되어 병원 신세를 지고, 치매 초기증상까지 발병한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상속에만 관심을 두고 엄마의 병간호는 뒷전이다. 내용적인 면만 본다면 여타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이 소설은 막내딸, 아들, 엄마, 큰딸이 각각 관점을 달리하여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변별점을 갖는다. 챕터별로 각자가 서술자가 되어 자신의 내면을 서술함으로써 다양한 목소리가 부/조화를 이룬다. 

   매장 운영 자금을 엄마에게 빌려 썼던 이력 때문에 막내는 큰언니의 패악과 욕설을 견뎌내야 한다. 큰언니와 오빠는 ‘나’가 엄마 재산을 모조리 가져다 썼다고 믿고 있다.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고, 그런 일 하지 않았다고 해명해도 내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진실이 만일 신체의 일부라면 떼어서 보여 주고 싶었다.”(2:105) 한편 아들은 딸들 모르게 어머니가 자신의 “집을 내 명의로 넘겨 가라고 했다. (…) 어머니의 성화에 떠밀리듯이 명의를 이전했다”(2:111)고 기억한다. 그러나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은 순전히 아들의 주관적인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제집에 도착하자마자 잠도 못 자게 하며 남은 돈이 얼마냐, 또 누구에게 빌려 주었느냐고 다그치더니 내 집문서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꼭 자동차에 받힌 기분이었다. 자식놈이 부모에게 칼 들이대고 돈 내놓으라는 패륜짓거리는 텔레비전 뉴스에서나 보는 줄 알았는데 아들놈이 하는 짓이 다를 바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남의 일일 때는 흉을 보았던 험한 일이 나한테도 닥쳤구나 싶어 기가 찼다. 그러나 아들과의 일이 늘 그렇듯 마음만 참담할 뿐 곱다시 당할 수밖에 없었다. (2:117)     


   아들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명의 이전을 했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다그침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어긋날 수밖에 없는 시차(視差)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각자의 목소리로 발화되지만 하나의 사건으로 수렴되는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서로를 의심하면서 오해의 불씨는 커지기도 한다. 자신의 입장을 하소연하듯이 밝히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이들은 전달을 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독백체의 말들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그 자체가 ‘타인과의 대화’라 이름 붙어짐으로써 그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역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대화가 서로에게 전해지지 않는 불가능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대화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다.      


그날 미친듯이 날뛰던 우리들 중에 지금의 이 모습을 상상해 본 자가 과연 있었을까. (…) 그러면 과연 우리는, 나는 무엇인가. 정대위 뿐만이 아닌 시민들의 총에 맞아 쓰러져간 군인들의 죽음은 어떻게 평가하고 보상받아야 한단 말인가. 목숨값으로 추서된 계급과 훈장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부끄러운 증거로 남게됐다. 약간의 위로금과 함께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쳤다는 그 알량한 명분들이 지금 무슨 평가를 받을 수 있겠는가. (1:235-236)


   마지막으로 『식탁이 있는 그림』의 「다리를 건너다」와 『장미화분』 속 「녹두 다방」을 언급하고 싶다. 이 두 작품은 80년 광주, 당시 군인 신분으로 현장에 투입되었던 이들의 사연과 관련되어 있다. “잊어버리려 했으나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던 그날의 참상들”(1:236)은 끈질기게 이들을 쫓아다닌다. 중편소설 「다리를 건너다」에서 정욱은 군에서 제대한 이후에도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린다. 부고로 전해진 병도의 일생은 온통 광주로 점철되어 있다. 출생지가 그곳인데다가 형은 학생운동에 참여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다. 그런 후 그 역시 대학 때 시위를 하다 강제 징집되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홀로 생을 마감한다. 광주를 모욕한 한병장에게 분노한 병도는 재판에 회부되고 정욱의 분투와 설득으로 하사관학교에 입교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된다. “벼랑 끝에 내몰린 듯한 절박한 현실”(1:277)에서 뜻밖에 동지였던 연희를 만나 결혼하지만 얼마 전, 고향친구를 만나고 온 뒤 술독에 빠져 살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광주는 병도를 죽음으로, 꿈 속에서 정욱을 끝없이 그 곳으로 데려가는 원체험으로 남아 있다.      

   “광주에 같이 투입됐던 동기생 두 놈이 죽었죠. 한 놈은 목을 맸고 또 한 놈은 물에 빠져 죽었어요.”(1:282)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광주의 기억은 병도뿐만 아니라 그날 그곳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휩쓸고 가버렸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대위 역시 광주에서 당한 부상 후유증을 앓던 중 가족마저 잃고 정처없이 떠돌이 삶을 살아왔다.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은 쉽게 자살에 노출되고, 그들 삶에 들러붙은 죽음들은 그들의 삶을 계속해서 갉아먹는다. 다리를 건너다 죽은 병도와 같이 ‘나’는 결국 죽음에 잡아먹히거나 온전치 못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오래전 5월의 그날 이후로 누군가 나를 찾기라도 하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는 버릇이 생겨 버렸다. 나는 범죄 현장에서 발각된 죄수처럼 불안해졌다.”(2:165) 「녹두 다방」 속 설동준 대위 역시 광주에서 부상을 당하고 절름발이로 살아간다. 함께 치료를 받던 한승우 대위는 정신병원에 갇혀 남은 생을 연명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에 선 한 대위의 연락으로 인해 잊어보려 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 여기로 되돌아온다. 그제야 광주에서 목숨을 잃은 사랑했던 여인 윤지수(의 묘)와도 대면한다. 그렇게 역사적 사건이 ‘나’의 삶에 휘말려 들어왔을 때 혹은 내가 그 역사를 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외면하고자 했던 그들과 다시금 마주할 수 있다. “비바람을 맞으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제는 기억해 줄 사람조차 없는 묘들은 쓸쓸한 고적감 속에 버려져 있었다.”(1:283) 문학만큼은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또 명치끝이 아파 왔다. 한번 시작된 통증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하고 끈질겼다.”(2:190) 그 앞에 선 ‘나’는 고통스럽지만 그 마주침이 더 나은 삶을 창안해낼 것이라 나는 믿는다. 역사에 연루된 상처 입은 자의 삶들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이와 같은 작품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결핍을 경험한 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상처는 다양한 형태로 발아되기 마련이다. 김현의 소설은 ‘나’의 트라우마로부터 시작해 무수한 타자로 확산되면서 수많은 인물들을, 그리고 80년 광주를 만나기도 한다. 그 스펙트럼이 확장됨으로써 소설적 지평 역시 확대된다. 상처입은 자가 자신의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누고자 하는 과정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게 나아가는 길에서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그 고통을 외면하거나 뿌리치지 않고 더욱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설 곳곳에 존재하는 통증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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