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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이면의 시간들(1)

─정인, 『누군가 아픈 밤』(호밀밭, 2021)


   1.      


   정인의 소설집 『누군가 아픈 밤』은 생(生)이 그려낸 무늬에 대한 기록들이다. 그 파동은 휘몰아치기보다는 반대로 잔잔한 쪽에 가깝고, 도드라지기보다는 도리어 흐릿하거나 희미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도 다가오는 “생의 황혼녘”을 추체험할 수 있고(「누군가 아픈 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위험한 이웃”과도 조우할 수 있다(「소리의 함정」). “부모님 생의 나이테가 오롯이 새겨진” 곳(「아무 곳에도 없는」)이라든가 “뿌리 깊지 못한 나무”(「이식(移植)의 시간」)의 사연도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지나온 생의 흔적에 여기저기 구멍을 내고 있”는 사람(「화마(火魔)」), 발소리에 “아로새겨진 그 사람의 삶”(「누군가 아픈 밤」)을 추측해 보는 일도 가능하다.  

   아픔이나 고통을 동반한 삶의 이야기 속에는 상처받은 생이 존재한다. “모든 상처는 꼭 그만큼의 자국을 남긴다.”(「꽃 중의 꽃」)고 한다면, 그 자국이 새긴 무늬, 다시 말해 그 흔적을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누군가 아픈 밤』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나지막한 이야기들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이들 이야기를 읽은 뒤에 우리의 삶에는 어떤 무늬가 새겨질 수 있을까.      


     

   2.      


   인간 실존의 근원적 중심이라 할 장소가 바로 집이며, 인간은 그 장소와 유대감을 맺고 살아간다. 그러나 집은 더 이상 안온한 장소가 아니고, 가족 역시 끈끈한 혈육의 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가족은 더 이상 친밀함을 보장하는 이름이 아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요양보호사가 가족을 대신해 엄마를 돌보고(「누군가 아픈 밤」),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해 가장의 역할을 했던 오빠의 살려 달라는 구조 요청마저 바쁘다는 핑계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소리의 함정」). 남편은 화재사고로 위장해 보험금을 노리려고 하고(「화마(火魔)」), 부모의 오랜 암 투병에 지친 자식들은 그들의 죽음을 방관하기도 한다(「아무 곳에도 없는」). 요컨대, 죽음이나 죽임으로 얼룩진 이들 관계 속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상을 확인할 수가 없다.

   그 비정함이 장소 상실과 어우러져 비극미를 더욱 강화시키는 작품이 「아무 곳에도 없는」이다. “흉물스럽게 방치된 풍경” 묘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옛집”과 더불어 거기에 얽힌 가족들과의 기억을 상기해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그녀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옛집으로 향한다. 각종 꽃들과 나무들로 기억되는 옛집은 그녀에게도 의미 있는 곳일뿐더러, 아버지에게 “최초이자 최후”였던 그 집은 아버지가 “고향나무”라 불렀던 소나무가 자리한 보금자리였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유일하게 당신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던 고향 뒷산의 소나무를 아버지는 생애 첫 집 마당으로 옮겨와 심고 가꾸어왔다. 그들 다섯 식구의 삶이 새겨진 그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의 차원을 넘어 아버지의 어린 시절로까지 이어지는 고향(장소)인 셈이다. “집은 그곳에 깃들었던 사람들의 생이 오롯이 새겨진 기억의 사원”이었다. 

   그 기억의 사원을 팔아 남동생은 초고층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고유한 장소성을 간직한 ‘옛집’과 균질하게 규격화 되어 있는 ‘아파트’의 대비는 무장소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편리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반짝이는 성채 안에서의 삶에는 고유한 장소감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아파트와 옛집이라는 장치만으로도 선명했던 대비는 ‘사라져버린 옛집’으로 더욱 극명해진다. 소설 초입 부분에 제시된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풍경은 옛집의 사라짐을 예견하게 한다. 남의 집이 되어버린 것에 그치지 않고 집이 아예 없어져버렸고, “장미꽃이 만발한 담장”의 옆집은 “더 이상 ‘누구네’ 집”도 아니다. 그곳엔 하늘마루 A동, B동과 같은 5층짜리 원룸 건물이 “제각기 다른 이름을 달고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다. 골목길에 스며있던 고유성은 재개발로 점차 휘발되어간다. “그곳의 문을 다시는 열고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다시는 갈 수 없는 옛집은 그리움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자책감과 죄의식”으로 뒤엉킨 곳이기도 하다. 오년의 투병 생활 뒤 생을 마감한 부모의 죽음은 오랜 간병으로 지쳐가던 삼남매의 다툼과 무관하지 않다. “나란히 손을 잡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이…” 죽은 부모가 실은 수면제 복용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소설 후반부에 밝혀진다. 자식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부모와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부모님의 고통을 줄여드리고 싶어 하는 자식의 마음은 비극적 결말을 낳게 된 것이다. 저 말줄임표에는 그녀의 “불온한 마음”이 숨겨져 있기에 옛집은 그녀를 복잡한 심경에 빠지게 만든다. 그 ‘죄’의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기에 한국(집)을 떠나 있었지만 돌아갈 곳이 부재한 지금, 그녀의 마음은 더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자식보다 나무를 더 소중히 여긴 아버지와 그 집이 싫었던 남동생 또한 집을 팔고 난 뒤에야 이를 깨닫고 흐느낀다. 그러나 부모님도 집도 더 이상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아픈 밤」에서는 물레 여사의 집이 곧 그녀의 처지를 드러낸다. 이때 ‘반지하’라는 공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한다. “무덤 속 같은 방” 안에서 “창구멍”을 통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듣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는 물레 여사의 삶은 사실상 ‘살아있는 죽음’에 가깝다.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창 바깥이 일상적 세계라 한다면, 이곳은 일상과는 분리된 공간이고 그녀는 그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창구멍이 “숨구멍”이기도 하다는 표현은 발소리를 듣는 일이 그녀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의미이다. 미국에 사는 작은딸이 찾아와주기를, 그 발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물레 여사의 간절함을 큰딸에게 전하지만 그녀는 동생이 이미 5년 전에 죽었다고 말한다. 물레 여사는 이미 삶의 끝자락까지 와 있는 셈이다.

   「화마(火魔)」에서 화재로 불이 나 타버린 집 현관의 “흉한 꼬락서니”는 위태로운 부부관계의 결말을 예견하고 있다. 한낮에 배전판 누전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정확한 원인은 알 수가 없는 상태지만 정황상 남편이 벌인 일일지도 모를 가능성이 다수 발견된다. 화재가 발생한 날은 평소와 달리 중문이 꽉 닫혀 있었고, 남편은 말도 없이 출근했다는 이상한 낌새가 있긴 했다. 그러던 차에 형사는 부인 앞으로 들어둔 “화재보험과 생명보험”에 대해 언급한다. “그렇게 말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사람” 같이 말하는 그의 날 선 대답은 내게 확증으로 작용한다. 남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이 근처에 들어선 대형마트로 인해 타격을 받게 되면서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것인데, 그 불이 애먼 곳에 붙게 된 것이다. 참사는 현관을 “숯굴”로 만들었고, 두 사람의 관계를 뒤흔들어놓는다. 나는 이 모든 게 “화마의 장난”이라 믿고 싶지만 뚫려버린 “구멍”을 도저히 메울 도리가 없다.

   이처럼 집이라는 장소는 실존적 탐색을 가능하게 하고, 소설 속 인물들은 집을 매개로 해서 인간관계의 어긋남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장소 상실을 통해 관계의 단절을 드러내는 방식이 탁월하다. 사라져버린 장소는 개개인의 기억을 보존할 수 없게 하며, 그럼으로써 고유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더욱이 집은 가족관계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작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한된 공간과 관계 내에서 모색 가능한 길 역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그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상실된 고유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관계를 창안해나가야 한다. 작가가 가족 단위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인과의 관계망을 그려나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비극적 결말로만 소설의 문을 닫아버리지 않고, 다른 시간들을 열어두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가족 역시 타인이다. 허나 가족이 남이가라는 말하면서 가족은 타인이 아니어야 함을 강조해왔고, 그것이 누군가에겐 강요가 되어왔다. 이혼한 큰딸이 부모를 보살피거나(「아무 곳에도 없는」), 중년의 여성인 요양보호사가 돌봄을 대신하고 있다. 구성원 중 일부가 희생이나 배려를 떠맡아야 하는 구조는 그 자체가 문제적이므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위의 세 작품은 집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가족/관계를 의문에 붙임으로써 독자들이 이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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