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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이면의 시간들(2)

─정인, 『누군가 아픈 밤』(호밀밭, 2021) 


   3.      


   위기의 시대에만 인간의 삶이 요동치는 게 아니다. 삶을 지탱하는 근본 조건 자체가 이미 불안정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는 일상에 적응하며 살다 보니 어떤 확고한 믿음이 만들어져서 이제는 그 진동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그로 인해 안정을 지향하는 사고 체계가 정립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욕망하며 삶을 영위해나간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불안은 어쩌면 우리 삶의 근본 조건인 셈인데, 많은 이들은 망각하거나 외면하면서 애써 그 동요를 회피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불안의 심연을 들여다봄으로써 타인과 마주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소설 속에 유독 ‘불안’과 ‘불면’을 겪고 있는 화자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리의 함정」은 소리에 예민한 타자들이 덫에 걸린 이야기이다. 전에 살던 집에서 나는 위층 아이들의 층간소음의 피해자였지만 이번엔 아랫집 남자에게 가해자가 된다. 내가 내지도 않은 소리가 들린다며 항의하는 아랫집 남자는 혼자만 있을 때 자신을 괴롭히던 소리에 시달렸던 나의 오빠와도 닮아 있다. 나는 피해자와 가해자, 죽은 오빠의 심정을 복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위치에 가로놓인다. 특히, 소설집에는 타인을 통해 이전에 경험한 타인(가족)이 겪었던 마음을 헤아려보고 그를 이해해보려는 가능성이 자주 발견된다. 「누군가 아픈 밤」의 하선미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물레 여사를 돌보면서 요양병원에서 죽은 엄마의 심정을 추측해보고, 「소리의 함정」 속 나는 아랫집 남자의 불안감을 대면하면서 죽은 오빠의 사정을 헤아려본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을 마주 선 자와 마주할 수 있고, 그들의 향방을 가늠해볼 수 있다.

   불안은 내적 발현 기제로부터 드러나는 증상이기도 하지만 관계 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화마(火魔)」, 「누군가 아픈 밤」, 「소리의 함정」 세 작품에서 불안 혹은 불면은 사건을 촉발시키는 기폭제이다. 「소리의 함정」에서 나는 오빠를 떠나보낸 뒤에야 뒤늦게 그 감정의 심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처음에는 오빠가 불안감을 갖고 있는 원인이 “아버지의 부재와 어른스럽지 못했던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빚 때문에 잠적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살아갈 날들에 대한 “걱정과 근심”, “불안”을 모두 오빠에게 전가시켰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의 “보호자” 역할을 도맡지 않는 엄마에게 “패악을 부”렸지만 오빠는 엄마의 “그런 말들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그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를 대신하며 엄마의 푸념을 받아낸 오빠의 가슴 속에는 “그 쓸데없는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오빠가 아주 “등신 같다고 생각”했지, 오빠 덕분에 내가 “안전지대”에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오빠의 “극심한 불안증과 공황 상태”가 깊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감정의 근원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오빠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못 견뎌 했다. 오빠에게로 향하는 온갖 알 수 없는 소리들은 반대로 오빠가 표출할 수 없었던 외침이자 절규였다. 들려오는 소리를 견딜 수 없었던 오빠는 어느 날 소란을 피운 뒤 내게 연락을 해왔다. 관리사무소에 가서 “막 소리 지르고 집어 던지”니까 속에 있는 뭔가가 “확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 그의 말은 숱한 감정의 응어리들이 그간 몸 안에 차곡차곡 쌓여왔음을 드러낸다. 누구도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이해해주지 못했고, 당사자인 오빠마저 그것과 마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나 역시도 오빠의 삶을 향한 “몸부림”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음을 뒤늦게 후회한다. 직장에서 한창 업무로 바쁠 때에 전화를 해서 얼버무리는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한심하게만 여”긴 적이 많았다. 나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바빴고, 나중으로 미루기 일쑤였다. 끝끝내 “방관자”였을 뿐이다. “독 안에 든 것” 마냥 갖가지 소리의 집중포화를 맞으며 홀로 괴로워하다 끝내 모든 것들과 작별해버린 오빠. 그 옆에 함께 있지 못했던 내 앞에 오빠와 유사한 증상을 호소하는 아랫집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처음 보는 낯선 타인에게 “나도 살고 싶어서 이럽니다.”라고 하는 그 남자를 나는 외면하지 못한다. 각종 실랑이 끝에 집 앞에 찾아온 남자는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한꺼번에” 감정을 터뜨린 그의 모습은 마치 오빠를 연상시키므로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타인은 완전하게 내 예상을 빗나간다. 설령 들리지도 않는 소리에 시달렸던 오빠를, 아이들 때문에 내 눈치를 살폈던 유진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들 아랫집 남자는 또 다른 타인인 것이다. 

   그러하다면 타인과 관계 맺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작가는 타인을 완전히 외면하지도 않고 쉽게 화해하는 포즈를 취하지도 않는다. 회한으로 남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 그것이 타인과 관계 맺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한 방편일지도 모르겠다. 고작 낯선 남자의 울음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일,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겨우 짐작해 보는 일이 가능할 뿐이다. 「소리의 함정」과 「이식(移植)의 시간」은 과거의 나의 인식을 되돌아본 뒤 현재를 다르게 구성해나가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이식(移植)의 시간」은 미래의 시간까지도 가늠해 볼 만한 여지를 남긴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일본 유학시절에 만났던 나와 겐고는 15년 만에 한국에서 재회한다. 겐고는 15년 전, 내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던 아버지의 유골함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났다. 이 작품은 나와 겐고가 헤어진 이유를 보여주면서 거기에 얽혀 있는 나와 겐고의 삶의 방식과 내력들을 드러내고 있다. 베트남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나의 “출생의 비밀”을 단박에 알아차린 겐고의 아버지는 모진 말들로 내게 상처를 준다. “순수 한국 애가 아”닌 “너 따위가 넘볼 곳”이 아니라며 교제를 불허한 그 “조롱을 가득 담은” 눈길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를 아프게 한다. 재일교포 2세로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순 한국식”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 했던 아버지에게 혼혈인 나는 불순하고 불결한 존재인 것이다.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아들의 반항에 대한 불똥이 내게도 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겐고와 나는 불안정했던 각자의 처지를 추스르기도 버거웠고, 아버지로 인해 둘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그 상처가 씻은 듯이 말끔해지지는 않는다. 겐고의 아버지가 뼛가루가 되어 고향땅을 밟았다고 해서 모욕당했던 옛 기억이 회복되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다만 겐고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나에게 왔다. “두렵고 서러운 감정이 내 가슴 속에 지금도 파편처럼 살아 있”지만 아버지를 떠나보내러 가는 그를 혼자 보내지 않고 ‘동행’하는 것. 눈발이 굵어지지만 “이 작은 공간에 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는 문장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허나 이들의 행보가 달라질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 희미한 희망에 기대본다. 두 사람이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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